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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하이큐

[다이스가] 꽃과 열기

잉티 2015. 9. 3. 00:27




[다이스가] 꽃과 열기




알파오메가/졸업 후/브리드 사이클(러트)




회사에서 돌아온 다이치는 냉장고에서 차가운 물을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시원한 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갔다. 텁텁했던 입 안이 조금은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는 옷을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웠다. 오늘 아침부터 머리가 아프다 싶더니, 아무래도 열이 있는 모양이었다. 다이치는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잘 모르겠다. 그는 서랍에서 전자체온계를 꺼내 귀에 갖다 대었다. 삐-. 짧은 기계음과 함께 액정에 숫자가 나타났다.


높네.


병원에 한 번 가봐야 하나. 다이치는 체온계를 넣으며 생각했다. 치밀어오르는 열기 때문인지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 방금 전 찬물을 마셨는데도 금세 입안이 뜨거워졌다. 후욱, 하고 느리게 숨을 토해냈다. 침대에 누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다이치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이미 저녁이라 웬만한 병원은 진료가 끝났을 터였다. 그가 부장에게 무어라 말할 지 고민하고 있는데 삐비빅, 하고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저 말고도 번호를 알고 있는 건 스가 뿐이었다. 다이치는 몸을 일으켰다.


“다이치.”


스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순간 훅, 하고 오메가 특유의 향기가 퍼졌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조금 전까지와는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한 열기가 머리끝까지 퍼졌다. 아랫배가 당겨왔다. 다이치는 단번에 증상을 알아차렸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스가. 잠깐, 오지 마…….”

“어디 아파?”


다이치는 욕정으로 떨리는 팔을 움켜쥐었다. 숨을 내쉴 때마다 더운 열기가 퍼졌다. 알파 향이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스가는 무언가 눈치챈 모양이었다.


“너, 브리드 사이클이구나.”


그렇게 말하는 스가는 생각보다 놀라지도, 뒷걸음질 치지도 않았다. 다이치는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수조차 없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억제하는 각종 약이 생겨나자, 이번에는 알파의 발정기가 생겨났다. 브리드 사이클(Breed cycle). 불규칙적이고 드물게 나타났다. 최근에 생겨난 현상이라 아직 뚜렷한 억제제도 없었다.


온몸이 뜨거웠다. 스가는 오메가 중에서도 향이 약한 편이어서, 평소에는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지금은 체향이 방안을 가득 메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부드럽고 꽃 같은, 욕정이 치밀어 오르는 향이었다. 스가는 가까이 다가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문 앞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이 느껴졌다. 다이치는 입술을 뭉갰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나가, 위험해.”


다이치는 뜨거운 열기를 목구멍 아래로 꾹꾹 내리눌렀다. 스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열기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서 고개를 돌렸다. 스가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제야 다이치는 꽉 움켜쥐고 있던 팔에 힘을 풀었다. 파랗게 멍이 들었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서랍을 뒤졌다. 열 때문인지 눈앞이 흐릿하게 어른거렸다. 예전에도 한 번 브리드 사이클이 온 적이 있었다. 그때 사둔 약이 어디 있을 터였다. 효과는 그다지 없지만 안 먹는 것보다는 낫겠지. 다이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서랍 속 잡동사니들을 휘저었다. 거실에 두었던가? 그는 문을 벌컥 열었다.


“아, 다이치.”

“너…….”


왜 안 나갔어, 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그보다 더 먼저, 머리가 핑 돌았다. 다이치는 벽에 기대어 가쁜 숨을 내뱉었다. 스가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오지 마. 다이치는 입술을 달싹였다.


“거기, 그, 서랍에 아마 약이 있을 거야. 하얀색 통.”


스가가 서랍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다이치는 눈을 감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헉, 헉, 하고 짧게 토해내는 숨에 짙은 향이 뒤엉켰다. 먼젓번에 왔던 것보다 훨씬 지독한 브리드 사이클이었다.


“이거?”


다이치는 슬몃 눈을 떠 스가를 바라보았다. 응, 그거. 맞아. 던져줘. 그는 다가오려는 스가에게 말했다. 약통을 열자 동그랗고 하얀 약들이 바글바글 담겨 있었다. 다이치는 두어 개를 물도 없이 씹어 삼켰다. 혀끝이 아릴 정도로 쓰다.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괜찮아?”


스가가 물었지만 다이치는 답할 수가 없었다. 증상은 점점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약을 삼킨 뱃속이 울렁거렸다. 다이치는 입을 틀어막았다. 제길. 그는 화장실로 들어갔다.


“우욱……, 하, 하아.”


헛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호르몬이 뒤엉켰는지 열기가 가시기는커녕 더 거세게 일어났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했다. 삐-하고 귀에서 이명이 울리는 것 같았다. 오메가 향기. 다이치는 무의식적으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헤어나올 수 없는, 아주 부드러운 향이 났다. 문을 닫았는데도 여전히 코끝에 맴돌았다. 다이치는 이를 악물었다.


안 돼.


브리드 사이클에는 임신 확률이 터무니없이 높아졌다. 절대 안 된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약통을 열었다. 동그란 약을 한 움큼 집어 입안에 욱여넣었다. 씹지도 않고 삼켰다. 제발. 제발. 다이치는 입을 막았다. 속이 뒤집혔다. 구역질이 치밀어 올라, 그는 삼켰던 약의 대부분을 거의 토해냈다. 등이 땀으로 흥건했다. 헛구역질을 해대느라 눈가가 발갛게 부어올랐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땀과 눈물로 엉망진창이었다. 다이치는 세면대를 붙잡았다. 수도꼭지를 열자 차가운 물이 콸콸 쏟아졌다. 그는 얼굴을 씻었다. 찬 기운이 닿자, 머리를 어지럽게 하던 열기도 조금은 가라앉는 것 같았다. 혹은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이치는 천천히 숨을 골랐다. 다이치는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것 중 가장 태연한 얼굴을 해 보였다. 그는 조심스럽게 화장실 문을 열었다.


“다이치, 괜찮은 거야?”

“응.”


스가는 예상대로 거실에 앉아 있었다. 다이치는 옅게 웃었다. 오메가의 향기가 폐부 깊숙이 파고들었다. 오래 끌수록 참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괜찮으니까, 어서 가 봐.”

“너,”

“괜찮다니까.”


스가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다이치는 스가의 손목을 확, 잡아끌었다. 직접 닿자 내리눌렀던 열기가 화르륵, 다시 솟구쳤다. 다이치는 고개를 숙이고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스가의 등을 떠밀었다. 어서.


“아, 잠깐만, 다이치.”

“내일, 내일 얘기 하자. 응?”


다이치는 현관문 밖에선 스가에게 말했다. 인내심이 빠르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손끝이 다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간신히 한 번 웃어 보이고는, 문을 닫았다.


“후우-.”


머리가 엉망이다. 다이치는 벽에 기대었다. 빌어먹을 억제제는 효과는커녕, 오히려 증상만 더 심해지게 만드는 것 같았다. 그는 비척비척 걸어가 침대에 쓰러졌다. 긴장이 탁, 풀려서 온몸에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내일 회사는 어쩌지. 다이치는 멍한 머리로 생각했다. 집 안에는 여전히 스가가 남겨둔 향기가 가득했다. 약을 받으려면 병원까지 가야 하는데 그럴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삐비빅, 하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어서 방문이 열렸다.


“스가…….”

“괜찮다는 거, 거짓말인 거 알아.”

“나가. 나랑 있으면 위험해.”


안 돼. 다이치는 뒤로 물러났다. 몸이 뜨거웠다. 안 돼. 못 참겠어.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열기를 머금은 단 숨이 흘러나왔다. 스가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었다.


“난 괜찮아.”


다이치는 어른거리는 시야 너머로 그를 바라보았다.


“난 괜찮다고. 너랑 자는 거.”


스가가 다가왔다. 그의 손이 팔에 닿는 순간, 다이치는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확, 솟구친 열기가 그를 잠식했다. 정신없이 스가의 머리를 붙잡고 입을 맞췄던 것 같다. 뜨겁고, 달아서. 향기가 온몸을 삼키는 것만 같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고 숨을 들이켰다. 하얗고 가느다란 등을 붙잡고, 도드라진 날개뼈를 더듬었다. 열기로 머리가 어지러웠지만, 제 아래의 말간 얼굴은 선명하게도 보였다. 모든 감각이 활짝 열린 것만 같았다. 스가는 내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이름만 몇 차례로 불렀던 것 같다. 다이치, 라고.




다이치는 침대 옆에 누운 스가를 바라보았다. 하얀 얼굴은 아직도 조금 발갰다. 땀에 젖은 시트가 축축했다. 열기가 완전히 가시자, 머리가 말끔해졌다. 그는 입술을 열었다.


“스가.”


움칠, 속눈썹이 움직이더니 그가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옅은 갈색 눈동자가 드러났다.


“임신하면 어쩌지.”


스가가 작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꼭 술 마시고 사고 친 모범생 같은 대사네.”

“웃지만 말고. 너 회사도 다니잖아. 어떡하려고 그래.”

“글쎄. 그만두게 되지 않을까.”


하아. 다이치가 낮게 한숨을 쉬었다. 스가가 손을 뻗어 그의 눈을 덮었다. 시야가 까맣게 변했다. 조곤조곤한 스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내가 선택한 거니까. 가라고 했는데 다시 돌아온 것도 나고.”

“하지만,”

“난 네 그런 점이 좋아. 언제나 진심인 점.”


스가는 손을 치웠다. 눈앞에 그의 얼굴이 보였다. 말갛게 웃고 있는 얼굴. 다이치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는 스가의 등을 끌어안았다. 맞닿은 체온이 따뜻했다. 고마워. 다이치는 속삭였다. 스가는 답하지 않았다. 다이치는 눈을 감았다. 부드럽고, 꽃과 닮은 그의 향기가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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