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이야기의 시작을 단지 한 번의 전화벨 소리라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러나 밤중에 전화가 울렸다. 낯선 이가 아니길 바라며 수화기를 든다. 낡은 구식 전화기다. 이제는 그 번호를 아는 사람이 많지 않다. 이따금 통신사며 대출 광고, 어눌한 보이스 피싱이 걸려오는 이 전화기에, 네가 찾아오기를 빈다. 수화기 너머는 말이 없다. 돌돌 말린 전선을 손가락으로 꼬며 창을 본다. 오늘 밤은 그믐이라고 했다. 고개를 내민 별들이 드물다. 이 침묵이 되레 반가운 이유는, 무엇?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던 어느 기다림처럼. 핸드폰의 번호를 가장 먼저 바꾸었으면서도 아직도 오랜 유선전화를 치우지 않은 이유를 너는 알고 있을까. 수화기를 잡을 때의 설렘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신호..
덥다. 오늘은 9월 13일이다. 가을이 막 찾아왔지만, 여전히 해는 뜨겁다. 비가 오고나면 기온이 한 움큼씩 내려간다. 덥다. 사실 더운 건 그것 때문이 아냐. 허벅지를 잡아 벌린다. 내장과 내장이 스치는 감각은 기묘하고도 혼란스럽다. 손가락 끝에서부터 서서히 용암 속에서 녹아내리는 듯한. 목덜미에 숨이 닿는다. 이만큼의 날숨이 이만큼의 이산화탄소를 만들어낸다는 것이 놀랍다. 아니, 그런 걸 생각할 틈도 없이, 다시. 선배. 부름을 밀어내듯이 그가 안으로 들어온다. 이렇게 부르면 그가 싫어한다는 걸 안다. 단지 “졸업한지가 벌써 몇 년이야”하고 무뚝뚝하게 대꾸하는 얼굴이 좋아서. 단단한 팔뚝을 붙잡는다. 열기로 땀이 흐른다. 등이 미끈거린다. 젖은 머리카락이 자꾸만 달라붙는 것을, 그가 한 손으로 쓸어 ..
똑똑. 실례합니다. 거기 제 앵무새 못 보셨나요? 배가 하얗고 날개는 초록빛이에요. 크기가 딱 이만한……. 문을 닫으실 필요는 없잖아요. 따지자면 제 앵무새가 마당으로 들어간 게 문제라고 할 수 있겠지만, 저기, 듣고 계세요? TV의 볼륨이 어찌나 큰 지 케이블 채널의 소리가 문 밖까지 들려온다. 거기서 유코 네가 나서면 어쩌자는 거야? 아주 정도 없는 계집애 같으니라고! 따지자면 아버님이 말한 게 뚝. 대문이 열렸다. 까만 눈동자가 힐끗, 아래를 내려다본다. 미간을 찡그린다. 새 같은 건 없다고 말하는 표정이다. 키가 작은 남자는 입을 열었다가 이내 닫는다. ─앵무새 [명사] 앵무과의 새를 통틀어 이르는 말. [비슷한 말] 앵가2(鸚哥)ㆍ앵무(鸚鵡)ㆍ팔가(八哥)ㆍ팔팔아. 보통 열대지방이나 뉴질랜드, 태..
그는 곡선이 없는 방 안에 살고 있다그는 생각한다, 이 방은정확한 각도로 오려진 유배지 - 속물의 방, 심보선 中 며칠 전부터 이어지던 소음이 보일러의 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아침이다. 워낙에 낡고 오래된 멘션이여서인지.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을 것이 분명한 보일러는 느릿하게 툴툴거린다. 겨울 아침의 공기는 차다. 창을 열고 지난밤을 날려 보냈다. 간밤의 불면조차 날아가는 듯하다. 눈이 뻑뻑하다. 화장실의 거울을 마주한 채, 어쩐지 충혈된 것 같기도, 라고 생각하며 면도를 한다.칫솔은 두 개였다. 모가 조금 벌어진 녹색 칫솔을 보다가 그 옆의 것을 집어 들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일은 번잡스럽지 않다. 물과 비타민 캡슐을 삼키고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열어둔 창 탓인지 팔뚝에 한기가 인다. 창문을 닫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