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쿠로] 여름 주말 아스팔트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여름이다. 장마가 지나간 뒤로 무더위가 기승이었다. 불금을 정말로 ‘불타는’ 금요일로 보낸 쿠로오는 길바닥에서 꾸역꾸역 놀고 걷느라 기진맥진한 몸으로 거실에 드러누웠다. 맥주 한잔의 정취, 라고 불렀지만 사실 노상 음주였다. 한 손에 맥주캔을 든 채 슬슬 돌아다녔는데, 익어가는 열대야에 김빠진 맥주는 미지근해지고 길거리 음식들은 뜨끈한 열기에 푹푹 쪄들어가는 금요일 밤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 숙취에 멍한 정신으로 일어난 쿠로오는 조금 전의 문장을 정정했다. 아침이 아니라 오후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내리 곯아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붙잡은 쿠로오는 멍하니 알림을 확인하다가, 구르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속! 그는 반쯤 흘러내린 반..
[아카스가] 雨中 무거운 비가 내렸다. 거리의 빛바랜 가로등이 느리게 점멸했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물웅덩이가 지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유리창을 스쳤다. 빈 거실에는 서늘한 고요가 감돌았다. 붉은 센서의 빛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깨끗한 개수대와 식탁. 하얀 바닥을 드러낸 쓰레기통은 먼지 하나 남지 않은 채였다. 아카아시는 습관처럼 마른 손끝을 매만졌다. 그는 또 보이지 않았다. 가을비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로 갔는지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스웨터 위에 얇은 코트를 걸쳤다. 단단한 신발을 신고, 우산을 하나만 챙겨 문밖을 나섰다. 연락이 없는 연인을 찾아. - 삶의 감각은 아주 오랫동안 타르처럼 흘러내렸다. 짙고 끈적거리는 권태. 어떤 적의들, ..
[리에야쿠] 숲속의 마법사 대륙의 동쪽 끝, 경계의 숲에는 마법사가 살고 있다고들 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 그 숲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마법사였다. 누군가는 새하얀 수염의 할아버지라고, 누군가는 아주 젊은 미녀라고 말했지만 마법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숲의 마법사는 용과 거인과 신들의 이야기와 함께 사람들의 현실 속에서 잊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은, 늦은 밤 어린아이의 머리맡에서나 간간이 나오게 되었다. 삐이-! 주전자가 시끄럽게 울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하품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딱,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그는 소년도 청년도 아닌 그 중간쯤의 얼굴을 하고, 분홍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슬리퍼를 느리게 끌며 젊은 남자는 녹차를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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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죽음과 맞닿은 엄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돌아선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실밥이 조금 드러난, 낡은 붉은색 원피스가 기억에 남았다.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입던 옷이었다. 처녀 시절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던. 잘 있으렴, 아가. 그녀는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따뜻한 입술과 희미하게 풍기는 화장품의 냄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 유쾌하지 못한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희미하게 바랜 기억이 유난히 꿈속에서만 선명했다. 흐릿한 부분은 상상인지 무의식인지 모를 것들로 채워졌다. 히나타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닿았다. “일어났군.” 카게야마의 목소리였다...
[카게히나] 스물, 서른 대학생 AU. 이곳이 어디지. 히나타는 생각했다. 이곳이 어디지, 라고. 번잡한 거리의 가운데에서 그는 가지를 절단당한 가로수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장마의 흐릿하고 눅눅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청명한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모든 건물들의 경계가 햇빛을 받아 명백한 아웃라인을 그리는, 꿈처럼 선명한 세계였다. 히나타는 분주한 거리의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 채 부유했다. 파란 표지판에는 낯선 언어가 쓰여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히나타는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쇼요.” 누군가의 부름에 그는 몸을 돌렸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이름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일순, 눈부신 햇살 탓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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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언젠가 찾아올 미래 판타지 AU.공녀 야쿠, 기사 리에프. 정교하게 꾸며진 풍경 정원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흐드러졌다. 바람을 타고 높은 창까지 그 향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청년과 소년의 중간에 선 어린 남자는 긴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까만 초커로 목을 옥죄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얌전히 늘어뜨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았다. 푸른 잔디와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그 사이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팔과 다리,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가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야쿠 씨!” 소년, 야쿠는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는 옅게 웃었다. 남자가 성 안 쪽으로 들어가는..
[쿠로츠키] 이른 가을 또 다른 세계.피아니스트 츠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쿠로오.어쩌다 사귀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 그가 또 찾아왔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에 푸른 커튼이 흔들렸다. 밝은 오후의 햇살이 마른 나무 바닥을 적셨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시야. 츠키시마는 귀에 익은 곡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가을 연주회가 몇 주 남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온 그는 가만히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맑은 음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는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았다. 츠키시마는 연주를 멈추었다. “쿠로오 씨.”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남자와 이렇게나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걸까.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나무 바닥의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했다. “보고 싶어서 찾아 왔어.”“제가 어디 있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