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카게히나] 스물, 서른


대학생 AU.




이곳이 어디지.


히나타는 생각했다. 이곳이 어디지, 라고. 번잡한 거리의 가운데에서 그는 가지를 절단당한 가로수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장마의 흐릿하고 눅눅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청명한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모든 건물들의 경계가 햇빛을 받아 명백한 아웃라인을 그리는, 꿈처럼 선명한 세계였다.


히나타는 분주한 거리의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 채 부유했다. 파란 표지판에는 낯선 언어가 쓰여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히나타는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쇼요.”


누군가의 부름에 그는 몸을 돌렸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이름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일순, 눈부신 햇살 탓에 남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히나타의 손을 붙잡았다. 단단한 굳은살이 손끝으로 느껴졌다.


“기다렸어?”


남자는 웃었다. 태양은 그 웃음에 밀려나기라도 하듯 구름 속으로 숨었다. 그제야 그의 얼굴이 바로 보였다. 말끔하게 올린 머리카락, 밤을 닮은 까만 눈동자. 남자는 몸에 꼭 맞는 와이셔츠와 검은 베스트를 입고, 드러난 손목에는 얇은 가죽 시계를 차고 있었다.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카게야마?”

“어.”


그는 히나타의 마지막 기억보다 조금 더 굵고 덤덤한 목소리와, 어째서인지 조금 더 성숙해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단순히 성장(盛裝)한 정장 때문인지, 혹은 분위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그는 이 낯설고 이상한 도시와 마치 하나인 것처럼 존재했다. 히나타는 문득 자신을 계속 두드리던 위화감을 알아차렸다.


“향수.”


그가 불쑥 뱉은 말에 카게야마가 의아한 얼굴을 했다.


“카게야마에게서 향수 냄새가 나.”


카게야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히나타를 바라보았다. 그와 시선이 마주쳤다. 검은 눈동자 너머로 기묘한 세계가 비쳤다. 모든 것들이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쇼요, 너 왜…….”


그는 굳은 살이 박힌 손끝으로 히나타의 손가락을 매만졌다. 작고 미묘한 접촉에 히나타는 손을 빼내지 못한 채 카게야마만을 바라보았다. 그는 말을 이었다.


“왜 다시 카게야마라고 부르는 거야?”


히나타는 단번에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조금이 지난 후에야, 카게야마가 자신을 쇼요라고 불렀다는 것을 깨달았다. 쇼요. 그 울림이 너무나도 친근해서 낯설다고 느끼지 못했다. 히나타는 대답을 짐작하고 있으면서도 입을 열어 물었다. 어쩌면 그의 입에서 확답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뭐라고 불렀으면 하는데?”

“토비오, 라고 그렇게 불러주었잖아.”


카게야마는 잠깐의 침묵 뒤에 그렇게 말했다. 히나타는 토비오, 라는 그 이름을 입 안에서 조심스럽게 굴려보았다. 낯선 울림이 봄꽃처럼 피어났다. 가끔 부르고 싶어 망설였던 이름이었다.


“이건 꿈인가봐.”


토비오. 히나타는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건데?”


카게야마가 미간을 좁히며 물었다. 히나타는 자그마한 미간 사이의 주름을 올려다보며 대꾸했다.


“모든 게 이상해서. 너는 나를 쇼요라고 부르고, 나는 너를 토비오라고 부르는. 여기는 이상한 도시야.”

“뉴욕이?”

“……뉴욕?”


히나타는 되물었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낯선 이름의 거리, 낯선 사람들. 눈부시게 쏟아지는 햇살이 모든 것을 낯설게 만들었다. 히나타는 카게야마를 보았다. 정장을 차려입은, 키가 아닌 다른 것이 한 뼘 자란 듯한 그. 머릿속이 복잡했다. 카게야마는 불쑥 손을 뻗어 히나타의 이마를 짚었다.


“아파?”

“그런 걸지도 모르겠어.”


히나타는 우물거렸다.


“분명 캠퍼스에서 잠깐 졸았는데, 어느새 여기야.”


캠퍼스라는 말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눈동자를 한 번 굴리더니 이내 물었다.


“쇼요, 몇 살이야?”

“스무살이잖아. 너랑 같은.”


나는……. 카게야마가 말끝을 흐렸다.


“나는 서른이고, 그리고 너도.”


너도 그래야하는데. 그는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그 말에 지금까지 마주했던 그가 한없이 낯설어졌다. 완전한 타인처럼, 오래전 어느 길가나 지하철에서 한 번 마주쳤을 법한 그런 사람처럼. 그렇지만 서른 살의 카게야마는 여전히 카게야마였다. 익숙한 얼굴을 한 그는 그저 조금 더 낮아진 목소리와 조금 더 성숙한 얼굴을 하고 서 있을 뿐이었다.


“이건 아주 이상한 꿈이거나, 아주 이상한 현실인가봐.”


히나타가 중얼거렸다. 카게야마는 작게 웃었다. 십 년 후의 그는 좀 더 웃음이 많은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 모습이 보기 좋다고 생각했다.


“이왕이면 아주 이상한 현실이라고 믿고 싶어. 시간을 이렇게 마음대로 건너 뛸 수 있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손끝에 닿는 카게야마의 체온이 너무나도 선명해서, 히나타 역시 이것이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둘은 낯설고도 익숙한 거리를 함께 걸었다. 히나타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국적인 도시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근데 왜 뉴욕이야?”

“출장 겸 휴가. 네가 한 번 와보고 싶다고 했거든.”


그렇구나. 히나타는 고개를 끄덕였다. 차들의 경적소리, 깜박이는 초록색 신호등, 새파란 하늘. 모든 것들이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현실감이 없었다. 그를 제외하고. 두 사람은 오래된 간판의 카페로 들어갔다. 히나타는 붉은 가죽 쇼파에 앉았다. 그는 턱을 괴고 뿌연 창밖을 내다보았다. 곧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신 그는 눈살을 찡그렸다.


“윽, 써.”

“입맛은 변하지 않네.”


카게야마가 웃었다. 그는 시럽을 넣은 쉐이크를 마셨다. 히나타는 손을 뻗었다.


“나도 줘.”


히나타는 차가운 쉐이크를 한 모금 마셨다. 카게야마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았다. 히나타의 시선이 그에게 닿았다. 히나타의 의아한 얼굴을 눈치챘는지 카게야마가 입을 열었다.


“그냥. 스무 살이여서 아쉽다고 생각하고 있어.”

“왜?”

“그 때는 아직 사귀고 있지 않았으니까.”

“뭐? 읏, 콜록콜록!”


히나타는 붉어진 얼굴로 기침을 뱉어냈다. 카게야마는 미간을 살풋 좁히고는 말했다.


“아니, 사귀고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딱 스무 살 즈음이었던 것 같은데.”

“지, 지, 지금? 아니, 지금이 아니고 그 때…….”


히나타는 두 손으로 쉐이크잔을 꼭 움켜쥐었다. 스무 살. 한창 여름 장마를 겪고 있었으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사귄다는 말이었다. 그는 입술을 우물거렸다. 스무 살부터 서른까지. 십년동안. 그렇게 생각하니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래. 네가 내 이름을 불러줘서. 그래서 어쩌면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어.”


카게야마가 말했다. 햇볕이 테이블 위에 쏟아졌다. 히나타는 그림자를 닮은 그의 눈동자가, 누구보다 햇살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그를 바라보던 히나타는 세계가 아주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외곽부터 아웃라인이 하나 둘 무너지고 있었다. 아지랑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사실은 아지랑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히나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엘리베이터가 급하강하는 것만 같이 울렁거렸다.


이렇게나 빨리. 그에게 아직 묻지 못한 것이 많았는데. 히나타는 황급히 입술을 뗐지만 목소리는 틀어막힌 듯 흘러나오지 않았다. 덜컹, 마루가 뒤흔들렸다. 그리고 곧 암전하는 것처럼 모든 것이 사라졌다.



***



시야가 돌아왔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강의실이었다. 커튼 너머로 빗소리가 들렸다. 끝없이 이어지는 장마가 창문을 두드렸다. 히나타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조금 전 일어났던 그 모든 일들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카게야마는 마지막으로 저에게 무언가 말하려고 했던 것 같았다. 흔들리던 시야 너머로 입술이 달싹였던 것이 기억났다. 뭐였을까.


느닷없이 앞문이 열렸다. 히나타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야, 히나타. 어디 갔나 했더니.”

“아…….”


히나타는 말끝을 맺지 못했다. 그가 기억하고 있는 스무 살의 카게야마가 눈앞에 서 있었다. 그는 여느 때처럼 미간을 조금 좁힌 채였다. 히나타는 충동적으로 말했다.


“토비오.”


아직은 익숙하지 않은 울림이 수면의 잔물결처럼 퍼졌다. 그 말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굳어졌다. 히나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괜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는 한참을 아무런 말이 없더니 불쑥 한 마디를 내뱉었다.


“오늘 8시 동아리에서 모이래.”

“어? 응. 알겠어.”


못 들었나? 히나타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살피려고 했지만 그는 이미 뒤돌아선 뒤였다.


“간다.”

“앗, 같이 가! 카게야마!”


 카게야마는 강의실 문을 열고 나갔다. 히나타는 그의 뒤를 쫓아 따라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가는 카게야마의 귓덜미가 유난히도 붉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