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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하이큐

[쿠로츠키] 이른 가을

잉티 2016. 2. 2. 00:57



[쿠로츠키] 이른 가을



또 다른 세계.

피아니스트 츠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쿠로오.

어쩌다 사귀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



그가 또 찾아왔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에 푸른 커튼이 흔들렸다. 밝은 오후의 햇살이 마른 나무 바닥을 적셨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시야. 츠키시마는 귀에 익은 곡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가을 연주회가 몇 주 남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온 그는 가만히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맑은 음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는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았다. 츠키시마는 연주를 멈추었다.


“쿠로오 씨.”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남자와 이렇게나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걸까.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나무 바닥의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했다.


“보고 싶어서 찾아 왔어.”

“제가 어디 있는 줄 알고요.”

“그냥.”


그는 항상 그렇게 말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어서. 츠키시마는 우스운 대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그 대답을 꽤 좋아했다. 누군가에게 물어물어 찾아왔을지, 제가 있을 법한 곳을 하나씩 다녔을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수고로움을 감추고 하는 “그냥”이라는 말에는 어딘가 말랑거리는 어감이 묻어났다.


“나 보고 싶지 않았어?”

“그다지요.”


쿠로오의 말에 츠키시마는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그는 악보를 넘겼다. 얇은 종이가 팔랑, 넘어갔다. 피아노의 옆에서 쿠로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츠키시마는 악보를 펼쳐놓고는, 한참을 아무것도 치지 않은 채 있었다. 가을 햇살 같은 침묵이 둘 사이를 감쌌다. 쿠로오는 츠키시마가 대화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츠키시마는 그런 식으로 말을 걸어오곤 했다.


“같이 돌아갈까?”

“5시까지 기다려준다면요.”

“좋아.”


둥. 낮고 묵직한 음이 울렸다. 츠키시마는 다시 연주를 시작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건반을 누를 때마다 해머가 올라가고 작은 진동이 음향판을 울렸다. 떨림 하나하나는 다시 손끝에 닿아 흩어졌다. 츠키시마는 그 모든 걸 좋아했다. 까맣고 반질거리는 외장도, 매끈한 건반도. 오랜 무기력 속에 잠겨있던 자신을 끌어올리는 것만 같은 음이었다. 늦은 오후의 연주에 그가 들어온 건 얼마 되지 않은 일이었다. 굳이 헤아려보자면 그랬다. 생각해보면 채 반년도 되지 않았는데 느낌은 사뭇 달랐다.


쿠로오를 처음 만난 건 지난봄에 있었던 연주회에서였다. 교내에서 하는 연주회였지만 제법 커다란 현수막이 걸렸다. 그리고 츠키시마의 이름도. 저는 꽤 주목받는 신인 중 하나였다. 홀의 뒤편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츠키시마는 쿠로오와 만났다. 쿠로오는 지루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손끝으로 팔걸이를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더니 말을 걸어왔다. 시지 않은 이야기들이었다. 그는 현수막에 적힌 츠키시마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었다. 혹은 그저 기억하는 척했던 걸지도 모른다. 어쨌든 그는 츠키시마의 이름에 아는 체를 했고, 으레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첫 만남은 그랬다. 그 이후 쿠로오는 종종 음대 건물로 찾아왔다. 제 위치를 어찌 알았는지는 모르지만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어.”라는 말로 모든 만남을 우연으로 돌려놓았다. 하루, 하루. 서서히 그가 익숙해졌다. 마치 모래에 물이 스미듯 자연스럽게 사귀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라고 단정 지을 수 없었지만, 어느새 그는 츠키시마의 일상과 맞닿아 있었다.


 뭉뚝한 시침은 어느 사이엔가 휘청 기울어 늦은 오후를 가리켰다. 약속했던 시간보다 한 움큼은 더 늦은 시간이었다. 쿠로오는 선잠이 들었는지 두 눈을 가만히 감고 앉아 있었다. 츠키시마는 그의 어깨에 손을 갖다 대었다.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더니 흐릿한 검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츠키……?”

“늦었어요. 돌아가죠.”


으응, 하고 그는 대답인지 아닌지 모를 소리를 냈다. 쿠로오는 늘어진 하품을 뒤로하고 일어나 가방을 챙겼다. 츠키시마는 그와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조용한 복도에 저벅저벅 발소리가 울렸다. 이른 가을의 오후는 아직 밝았다. 하늘 끄트머리에는 붉은 태양이 걸려있었다. 흐드러진 구름이 다채로운 색으로 빛났다. 쿠로오는 문득 물었다.


“있잖아, 내일 학교 일찍 가야 하지 않아?”


그 말에 츠키시마는 옅게 웃었다. 속이 빤히 보이는 물음이었다. 그 솔직함이 싫지 않게 느껴지는 건, 어쩌면 이미 그를 좋아하게 되어버렸다는 증거일지도 모르겠다. 아침 일찍 수업이 있을 때면 항상 그의 집에서 잤다. 한두 번 그렇게 했던 것이 이제는 의례 당연한 일처럼 굳어져 버렸다.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까만 눈동자 너머로 노을이 지는 하늘이 비쳤다.


“네, 일찍 가야 돼요.”


쿠로오의 얼굴에 웃음이 번졌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 일찍 깨워줄게.”


츠키시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쿠로오는 기분이 좋은지 허밍으로 제목을 모를 곡을 불렀다. 내일 첫 수업, 2시였지만. 웃고 있는 그의 옆모습을 보고 있자니, 거짓말도 나쁘지 않겠다 싶었다.



***



불이 꺼진 집안은 적막했다. 쿠로오는 달깍, 스위치를 켰다. 형광등의 밝은 불빛에 눈이 따가웠다. 츠키시마는 익숙하게 옷을 갈아입고 쇼파에 앉았다. 체크무늬 담요를 깔아놓은 가죽쇼파는 쿠로오의 집에서 좋아하는 것들 중 하나였다. 그가 저녁을 준비하는지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은 마주 보고 저녁을 먹었다. 설거지는 츠키시마의 몫이었다. 쿠로오가 들고온 달콤한 코코아를 들고 두 사람은 쇼파에 앉았다. 습관처럼 튼 TV에서는 지루한 이야기만 흘러나왔다. 츠키시마는 다시 TV를 껐다. 적막이 흘렀다. 쿠로오는 가만히 츠키시마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웠다. 그의 다리가 쇼파 밖으로 넘어갔다. 어두운 밖에서는 사람들의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무어라 외치는 소리, 노랫소리, 누군가 켜는 현악기 소리 같은 것들.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


“만약에 네가.”


츠키시마는 그의 까만 눈동자를 보았다.


“피아노를 하고 있지 않았더라면, 무얼하고 있었을까?”


쿠로오의 시선은 어딘가 까마득한 곳을 더듬고 있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세계, 혹은 지금의 너머, 또 다른 곳을. 츠키시마는 쿠로오의 반듯한 이마와 그 아래에 솟은 코, 살짝 벌린 입술을 가만가만 바라보았다. 피아노를 하고 있지 않은 나. 갈림길의 반대편을 고른 나는, 지금쯤 무얼 하고 있을까.


“글쎄요. 쿠로오 씨는 뭘 하고 있었을 것 같아요?”


쿠로오는 경제학과를 전공하고 있었다. 츠키시마는 그가 무얼 배우는지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하나 확실한 게 있다면 쿠로오가 경제와 맞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쿠로오는 언제나 제 전공을 싫어했다.


“나는 아마……배구를 하고 있지 않았을까.”

“배구요?”


응, 배구. 쿠로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너무나도 낯설고, 단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츠키시마는 제 가느다란 손가락을 보았다. 하얗고 마른, 사기조각 같은 손가락. 오롯이 피아노를 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 같다고 모두가 그렇게 말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배구부 했었거든. 대입 때문에 고등학교에 들어와서는 그만뒀지만. 리시브라던가, 나 꽤 잘했어.”

“배구하는 쿠로오 씨라니 낯서네요.”

“계속했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국가대표가 되어 있었을지도 모르지.”

“국가대표를 만만하게 보는 발언인데요, 그거.”


그 말에 쿠로오가 낮게 웃었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잖아. 지금의 나는 그냥 평범한 경제학 전공인 학부생일 뿐이고. 너는 어때?”

“……잘 모르겠네요. 피아노 말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츠키시마는 손가락 끝을 만지작거렸다. 피아노는 아주 어릴 적부터 해온 것이었다. 거의 첫 기억이나 다름이 없었다. 처음 고른 길을 당연하게 여기고 걸어왔다. 츠키시마는 반쯤 농담처럼 말했다.


“어쩌면 쿠로오 씨랑 같이 배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죠.”

“네가?”

“저 키도 크잖아요.”


츠키시마는 그렇게 말하며 웃었다. 쿠로오는 잠깐 말이 없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냐, 배구는 안 돼.”

“왜요?”


그 물음에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손가락을 움켜쥐었다. 단단한 손이 닿았다.


“난 네 손가락을 사랑하거든. 배구를 하기에는 너무 예쁜 손이야.”


쿠로오는 길고 마디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을 입술에 갔다 대었다. 촉, 하는 소리가 났다. 츠키시마는 간지러운 듯 발끝을 움츠렸지만 손을 빼내지는 않았다. 쿠로오는 가장 아끼는 것을 대하듯 입을 맞추었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역시 넌 피아노를 치고 있는 모습이 어울려.”


그렇게 말하는 그의 웃음에 가슴 한편이 간질거리는 것만 같았다. 제 그림자가 드리워진 쿠로오의 얼굴을 보면서, 그의 반듯한 이마와 콧날과 입술의 가지런함을 보며, 츠키시마는 문득 고개를 숙였다. 충동적인 움직임의 끝에서 둘의 입술이 맞닿았다. 작고 가벼운, 이른 가을의 밤 같은 입맞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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