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스토리 뷰




[리에야쿠] 언젠가 찾아올 미래



판타지 AU.

공녀 야쿠, 기사 리에프.



정교하게 꾸며진 풍경 정원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흐드러졌다. 바람을 타고 높은 창까지 그 향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청년과 소년의 중간에 선 어린 남자는 긴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까만 초커로 목을 옥죄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얌전히 늘어뜨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았다. 푸른 잔디와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그 사이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팔과 다리,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가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야쿠 씨!”


소년, 야쿠는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는 옅게 웃었다. 남자가 성 안 쪽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야쿠는 그의 모습이 사라지는 걸 보고 나서야 손을 거두었다. 곧 그가 올라올 터였다. 야쿠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그는 눈을 깜박이며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그는 이내 무언가를 깨달은 듯 안쪽 서랍을 열어 하얀 실크 장갑을 꺼냈다.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이 보였다. 검 한 번 잡아본 적 없는 손가락이었지만, 단단한 윤곽선은 여성의 것과는 거리가 있었다. 야쿠는 손가락을 장갑 안에 밀어 넣었다.


그는 거울 앞에 서서 매무새를 정리했다. 동그란 눈동자와 얇은 입술. 작은 체구. 얇은 천으로 덧대어 부푼 드레스는 남성적인 선들을 감싸주었다. 야쿠는 눈을 감았다.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문밖에서 익숙한 발소리가 들렸다. 몇 번이고 덧그린 가죽 신발의 소리. 이윽고 문이 열렸다.


“야쿠 씨. 잘 있었어요?”


고양이의 것을 닮은 초록색 눈동자가 예쁘게 반짝였다. 남자는 성큼성큼 다가와 야쿠의 손을 맞잡았다. “보고 싶었어요.”라고 말하며 웃는 얼굴이 천진난만했다. 야쿠는 긴장으로 목구멍이 죄어오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오랜만이야. 리에프.”


저보다 큰 리에프를 똑바로 응시하며.


“전보다 키가 컸네.”

“야쿠 씨는……그대로네요.”

“조용히 해.”


야쿠는 미간을 좁히며 대꾸했다. 리에프는 웃었다. 오랜만에 다시 보는 그의 웃음에 뱃속이 간질간질했다. 수만 마리의 파란 나비들이 한 번에 날아오르는 느낌이었다. 야쿠는 홍차를 한 모금 마셨다. 혀끝에 맴도는 긴장까지 함께 삼켜버리고 싶었다. 긴장 때문인지, 아니면 으레 있는 병증인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는 희미하게 피어나는 두통을 애써 물리며 물었다.


“기념품은?”

“기념품이요?”

“그래. 북방에 2년이나 있었는데 기념품 하나 없단 말이야?”


어어, 하며 그가 말을 끌었다. 야쿠는 손끝으로 입가를 가리며 슬몃 웃었다. 보나 마나 까맣게 잊었겠지. 리에프는 그렇게 섬세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 점이 더 좋았지만. 리에프는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며 더듬더듬 말을 늘어놓았다.


“어어, 야, 야쿠 씨 주려고 사온 게 있어요. 그러니까…….”

“반지?”

“네? 네, 네! 그거요.”


야쿠가 장난삼아 던진 말에 리에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지만, 저보다 더 놀란 리에프를 보며 금세 상황을 눈치챘다.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저 고개를 끄덕인 모양이었다. 야쿠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래? 리에프가 사주는 반지라니, 기대되네. 다음에 볼 때는 갖다 줄 거지?”

“어, 네에. 갖다 드릴게요.”


어디서 반지를 구해와야 할 지 고민하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였다. “이만 가봐야 하지 않아?”라는 그의 말에 안절부절못하던 리에프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쿠는 잘 가라며 손을 흔들었다.



***



야쿠는 쇼파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는 맞은편에 앉은 쿠로오를 보며 입을 열었다.


“담배 냄새나.”


쿠로오는 고개를 들어 야쿠를 바라보았다. 그는 파이프를 입에서 떼고는 하얀 연기를 후욱, 토해냈다. 야쿠는 눈살을 찡그렸다. 쿠로오는 파이프를 내려놓았다.


“좀 봐줘. 요새 일이 많아서 골치가 아프다고.”

“그게 남의 응접실에서 담배를 피울 이유가 되는 것 같지는 않은데. 그리고 담배는 네 건강에도 안 좋아.”

“알겠어, 알겠어. 하여튼 엄마가 따로 없다니까…….”


쿠로오는 작은 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렸다. “뭐?” 야쿠는 되물었지만, 그는 대답해주지 않았다. 쿠로오는 능숙하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서, 리에프가 반지를 주기로 했다고?”

“어. 아니, 줄지 안 줄지는 모르겠지만. 받았으면 좋겠네.”


야쿠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쭉 펴 보였다가, 여느 여자아이들처럼 곱고 가느다랗지 않은 손이 거슬려 다시 오므렸다. 그는 장갑을 끼려다가 말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쿠로오 앞에서까지 굳이 불편함을 감수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야쿠가 남자인 걸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쿠로오는 야쿠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러고 보니까 리에프 아까 봤어.”

“뭐? 어디서?”

“21번가 광장에서. 어떤 여자한테 고백받고 있던데.”


쿠로오가 싱글싱글 웃으며 대꾸했다. 야쿠는 얼굴을 팍 구겼다. 고백? 고백이라고?


“그래서?”

“뭐가 그래서야?”

“그래서 리에프가 뭐라고 대답했는데?”


야쿠는 당장에라도 쿠로오의 멱살을 잡을 기세였다. 쿠로오는 놀리듯 어깨를 으쓱했다.


“글쎄?”

“죽고 싶지 않으면 빨리 말해.”

“‘전 아가씨가 누군지 잘 모르는데요’래.”


그 말에 야쿠는 쇼파에 주저앉았다. 하아……. 그는 느리게 숨을 내뱉었다. 야쿠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쓸데없이 인기가 좋아, 그 녀석. 쓸데없이. 그 멍청하고 눈치도 없는 게 뭐가 그리 좋다고 쫓아다니는 거야.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지. 야쿠는 그렇게 생각하며 쓰게 웃었다. 고백할 용기도 없으면서, 누군가 그와 사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불안과 초조가 치밀어 올랐다. 언제까지 이렇게 숨기고 있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말, 하고 싶지만. 이야기한 뒤에도 그는 여전한 모습으로 내게 웃어줄까?


“무슨 생각 하냐?”


한참을 말이 없자 쿠로오가 물어왔다. 야쿠는 마른 입술을 적셨다. 별거 아냐. 그는 그렇게 대꾸하고는 결국 말을 덧붙였다.


“있잖아. 나, 리에프한테 말할까.”

“네가 남자라고?”

“어.”


쿠로오는 미묘한 얼굴이었다. 야쿠는 제 앞의 홍차가 술이라도 되는 듯, 단번에 들이켰다. 목이 바싹바싹 타는 것 같았다. 눈앞의 쿠로오는 야쿠가 남자인 걸 아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어린 날 병으로 단명한 쌍둥이 누이를 대신해, 야쿠는 공작가의 하나뿐인 공녀가 되었다. 도드라진 목젖을 감추고, 손목까지 덮는 드레스를 입었다. 이 같잖은 연극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가 없었다. 아마 적당히 외국으로 보내지지 않을까, 그저 그렇게 생각만 할 뿐이었다.


“……아냐, 됐다. 잊어줘.”


쿠로오는 야쿠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야쿠는 입술을 짓이겼다. 리에프. 그가 보고 싶었다. 아니, 동시에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없었더라면 이 지겨운 인생을 그냥 받아들였을지도 모르는데. 아아, 역시 보고 싶다.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은발도, 아몬드 같은 눈동자도, 웃으면 드러나는 가지런한 치아와 그 안의 가만한 붉은 혀. 그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가까웠지만 결국 제가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다.



***



갑자기 문이 열렸다. 쿠로오, 노크하고 들어오라니까. 야쿠는 한손으로 턱을 괸 채 중얼거렸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야쿠는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는 리에프가 멀뚱멀뚱 서 있었다. 야쿠는 당황을 애써 감추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황급히 옷매무새를 확인했다. 초커도, 하얀 장갑도 드레스도 완전했다. 그제야 야쿠는 희미하게 웃으며 리에프를 마주 보았다.


“야쿠 씨, 선물 가져왔어요!”

“선물?”


눈을 깜박이며 되묻자 리에프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아. 그제야 야쿠는 저번의 반 장난이었던 약속을 떠올렸다. 반지……. 상자를 열자, 초록색 보석이 박힌 은색의 반지가 놓여있었다. 야쿠는 반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손가락을 내밀었다.


“끼워 줘.”

“네?”


끼워 달라니까. 자. 야쿠는 왼손을 곧게 폈다. 부드러운 실크 장갑 위로 리에프의 손가락이 맞닿았다. 리에프는 반지를 네 번째 손가락에 조심스럽게 끼웠다. 야쿠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상황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왼손을 내민 거긴 했지만 정말 약지에 끼워줄 줄은 몰랐다. 가지런하게 내리깐 리에프의 속눈썹이 바로 눈앞에서 보였다. 제 숨소리가 너무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야쿠는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됐어요.”


리에프의 말에 야쿠는 느리게 숨을 내쉬었다. 약간 크다고 생각했는데, 장갑 위에 끼우니 딱 맞았다. 야쿠는 리에프를 올려다보았다. 의도한 걸까?


“예쁘네.”


야쿠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죠? 오른손은 필기할 때 불편하니까 왼손에 해야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아, 약지 말고 새끼손가락에 할 걸 그랬나. 그게 덜 불편할 것 같은데…….”


아. 역시. 별 생각 없이 한 거였네. 야쿠는 쓰게 웃었다.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제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는 마음에 뿌듯하게 들어찼다. 그는 리에프를 바라보며 말했다.


“나 왼손잡이인데.”

“에? 그럼 오른손에 다시 끼울까요?”

“아니, 괜찮아.”


이쪽이 더 마음에 들거든. 야쿠는 웃으며 왼손을 바라보았다. 초록색 보석이 유리조각처럼 반짝였다. 마치 햇살 아래에 선 리에프의 눈동자처럼. 언젠가는, 그래, 정말 그에게서 반지를 받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리고 나도 리에프에게 그와 닮은 반지를 끼워주는 그 언젠가.


하지만 그 언젠가가 오지 않는다고 해도 좋아. 부푼 기대가 그린 미래보다, 지금 이 순간의 벅참이 더 가슴 뛰게 다가오니까. 설령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해도.


야쿠는 손끝으로 반지를 매만졌다. 고마워. 그는 작은 목소리로 말하며, 리에프를 향해 웃었다.



공지사항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Total
Today
Yesterday
링크
TAG
more
«   2024/07   »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