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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하이큐

[아카스가] 雨中

잉티 2016. 11. 15. 13:29

[아카스가] 雨中

 

 


 

 

무거운 비가 내렸다. 거리의 빛바랜 가로등이 느리게 점멸했다. 검은 아스팔트 위로 물웅덩이가 지고,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유리창을 스쳤다. 빈 거실에는 서늘한 고요가 감돌았다. 붉은 센서의 빛만이 오롯이 빛나고 있었다. 깨끗한 개수대와 식탁. 하얀 바닥을 드러낸 쓰레기통은 먼지 하나 남지 않은 채였다. 아카아시는 습관처럼 마른 손끝을 매만졌다.

 

그는 또 보이지 않았다.

 

가을비가 며칠째 이어지고 있었다. 더는 견디지 못한 모양이다. 어디로 갔는지 떠올려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는 스웨터 위에 얇은 코트를 걸쳤다. 단단한 신발을 신고, 우산을 하나만 챙겨 문밖을 나섰다. 연락이 없는 연인을 찾아.

 

 

-

 

 

삶의 감각은 아주 오랫동안 타르처럼 흘러내렸다. 짙고 끈적거리는 권태. 어떤 적의들, 어떤 호의들이 지겹도록 그의 세계를 침범하려 했다. 단단하게 굳어진 타성은 쉬이 닦아낼 수 없었다. 아카아시는 이성이 깨어난 순간부터 자신이 보는 세계가 타인과 다르다는 걸 알았다. 또래의 슬픔을 이해하지 못한 때부터였다. 아비의 죽음이 기껍고, 어린 짐승의 역약함이 안쓰럽지 않았을 때. 자신이 날 때부터 다른 종()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를 만난 건 스무 해가 꼬박 지난 뒤였다. 짙푸른 커튼 사이로 하얀빛이 쏟아지는 봄날이었다. 그는 같은 강의실에 있었다. 한눈에 시선이 가닿았다. 불그레한 손끝과 달싹이던 입술. 슬몃 접히는 눈가. 아카아시는 그날, 처음으로 마음에 차는 것을 찾았다. 긴 권태를 견디고 마침내 드러난 욕망은 뚜렷하고 날카로웠다. 스가. 그의 친구가 그렇게 부르는 것을 들었다. 부러 뒷자리에 앉았다. 너머다 본 어깨너머로, 하얀 노트 맨 위에 또박또박 적힌 이름 스가와라 코우시(菅原 孝支). 혀가 마르는 갈증의 시작이었다.

 

 

-

 

 

여기 있었어요?”

 

좁은 골목은 어둡고 습한 그림자로 젖어 들어갔다. 구겨진 캔이 발끝에 채였다. 비냄새에 섞여 희미한 쓰레기의 냄새. 그 끝자락, 익숙하고도 역한 내가 났다. 우의를 쓴 남자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케이지.”

 

입술이 느리게 열린다. 옅은 눈동자가 빛을 받아 설백색으로 빛났다. 겨울을 닮은 눈이다. 아카아시는 그에게 다가갔다.

 

스가 선배.”

 

손이 차가워요. 아카아시는 스가의 손끝을 붙잡았다. 검은 우의 끝으로 더운 피가 뚝뚝 흘러내렸다. 흔적은 빗줄기에 섞여 하수구 아래로 흘러들어 갔다. 아카아시는 손수건으로 날카로운 칼을 감쌌다. . . 검은 우산 위로 빗방울이 자꾸만 떨어졌다. 젖은 뺨과 습한 등골. 스가는 만족도 불안도 아닌 어중간한 얼굴을 하고는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아카아시가 시체를 저만치로 밀어 넣고, 쓰레기더미로 덮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기묘한 침묵 사이로 빗줄기가 자꾸만 거세졌다. 스가는 우비를 입고도 이미 흠뻑 젖은 것 같았다. 아카아시는 웃으며 말했다.

 

이제 가요, 선배.”

 

붉은 피는 거의 씻겨 내려갔지만, 희미한 냄새는 어쩔 수가 없다. 아카아시는 스가를 내려다보았다. 내리깐 긴 속눈썹 끝에 물기가 묻어있었다. 울지 않았다는 걸 알면서도 손끝이 저리다. 그는 손을 뻗어, 찬 손가락을 마주 잡았다. 서늘한 감촉이 시체 같다. 빗소리에 뼛속까지 한기가 스미는 듯.

 

비가 와서 그래.”

 

스가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생각보다 매끄러웠다.

 

비가 아주, 오랫동안 와서. 어젯밤도 그 전날 밤도 꼬박 지새웠어.”

 

그는 아주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카아시는 제 손끝이 꽉 억눌리는 걸 느꼈다. 그는 스가를 향해 고개를 조금 숙였다.

 

, 알고 있어요.”

 

속삭이는 목소리는 빗줄기 사이로 또렷했다. 알고 있어요. 그는 확인하듯, 다시 한 번 말했다. 스가는 그의 어깨에 젖은 이마를 기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에서, 둥근 이마만이 미지근했다. 아카아시는 한쪽 손으로 그의 뺨을 감쌌다. 회색빛이 감도는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이것이 봄볕 아래에서 얼마나 눈이 부시게 빛나는지, 또 이 어두운 우중(雨中)에서는 얼마나 시린지. 기쁨보다도 달고 선명하다. 아카아시는 고개를 숙여 그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

 

 

늦은 가을장마는 예년보다도 유난히 길었다. 인내심을 시험이라도 하듯. 가는 손가락의 끝이 식탁을 두드렸다. , . 유리 위로 실금이 그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 같다. 스가는 몇 번이고 물을 찾았다. 목이 탔다. 창밖으로 넘실거리는 빗소리를 잊고 싶어 자꾸만 욕조에 몸을 담갔다. 잊고 싶은 감각이 구역질처럼 치밀었다.

 

괜찮아.

 

내일이면 비가 그친다고 했다. 잠깐 볕을 쬐면 괜찮아질 것이었다. 일주일 째 끊이지 않은 빗줄기는 그의 신경을 긁다 못해 거득 휘저어놓았다. 잘 챙겨 먹어요, 선배. 말랐잖아요. 아카아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스가는 마른 양팔을 움켜쥐었다.

 

후드득. 여린 빗줄기가 거세졌다. 유리창을 우박처럼 내리치는 소리. 아파트의 저 아래, 하수구를 향해 달려드는 물줄기의 비명이 들렸다. 흙은 바닥으로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숨이 막힌 곤충들이 다리를 부비는 소리, 바스러지는 페인트칠 소리, 고양이들의 호흡. 모든 것들이 선명하게 그의 귓가를 스치는 듯했다. 이미 잊어버린 먼 날의 기억이 뿌옇게 되살아났다.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스가는 불안을 견디지 못하고 손톱을 짓씹었다. 너덜너덜해진 손끝에 스친 여린 살에는 생채기가 났다. 입술이 말랐다. 목이 마르고, 신경이 쓰였다. 신경이.

 

그는 물기 어린 유리창을 몇 번이고 다시 닦았다. 작은 물방울들이 뭉쳐서 이내 또르륵, 유리창 위를 흘러내렸다. 스가는 손끝을 움켜쥐었다. 비가 언제, 사람의 말대로 그친 적이 있는가? 고요한 집에는 그 혼자였다. 그는 마른걸레를 내려놓았다. 이번 주에만 벌써 두 명이 죽었다. 아카아시가 새 도시를 알아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비가 시신을 숨겨주었지만 이 장마가 그치고 나면 한동안 시끄러워질지도 몰랐다.

 

칼날이 살을 가르는 감각이 떠올랐다. 생의 감각이다. 언제부터 그렇게 여겼는지는 까마득했다. 다만 이렇게 비가 오는 날이면, 목이 마르고, 다시 손끝이 떨리도록 그 감각이 떠올랐다. 진흙, 비 냄새와 섞이던 혈향이 코끝을 거짓처럼 스쳤다. 마른 손가락 마디마다 찬기가 스미는 것 같았다.

 

아카아시. 스가는 애원하듯 그 이름을 삼켰다. 그는 늦은 밤 돌아오겠다고 했다. 어서 오라고 말하는 건 너무 투정일까. 사실 무엇보다 바라고 있으면서도, 바람은 쉬이 언어가 되지 못했다. 나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싫었다. 깨문 손톱을 가지런하게 다듬고 어지러운 방안을 정리한 뒤에야 그는 웃을 수 있었다. 불안을 감추는 건 오랜 버릇이었지만, 그의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왜겠어? 스가는 힘없이 웃었다. 기다림의 시간은 길고도 질척거렸다.

 

 

 

비가 잠시 그치고, 희미하게 땅거미가 졌다. 구름은 여전히 잿빛이었다. 어둑해지는 바깥에 하나둘 불빛이 들어왔다. 복도의 발소리가 들렸다. 스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한나절 동안 너덜너덜해진 신경이 파르르 일어나는 듯했다. 아카아시는 검은 우산을 가지런히 접고는 안으로 들어왔다. 스가는 저도 모르게 젖은 손을 붙잡았다.

 

아카아시.”

 

잠긴 목소리의 끝이 갈라졌다. 그의 손가락이 스가의 손을 움켜쥐었다.

 

기다렸어요?”

 

스가는 대답하지 않았다. 까만 눈동자의 너머로 창밖의 불빛이 비치는 것 같은, 기묘한 환상이 그를 사로잡았다. 다문 입술이 열렸다. 씻고 올게요. 욕실의 문이 열리고, 다시 닫혔다.

 

. . 빗방울이 하나둘 창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다시 비가 온다. 신경을 붙잡고 끝없이 늘어진다. 지긋지긋하다. 스가는 떨리는 숨을 삼켰다. 세상을 둘로 가르는 듯한 이명이 다시 먼 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척추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이질감. 불안이 우짖는다.

 

불안하면 전화하라고 했잖습니까.”

 

어느새 다가온 그가 말했다. 욕실의 문은 열려있었다. 더운 김 사이로 채 마르지 않은 물방울이 똑, 똑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스가는 옅게 웃었다.

 

어떻게 그래.”

 

어떻게. 네게 번거로움이 되고 싶지 않아서 쇼파에 웅크려 불안을 가라앉히곤 하는 내가. 나는 이미 응석받이인데. 친절은 두 번 세 번이 지나고 나면 껄끄러움이 되고는 한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내가, 어떻게.

 

침묵 속에서 아카아시는 스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또 혼자 기다렸죠?”

.”

비가 오고 있어요.”

그래. 나는…….”

 

물기가 덜 마른 뺨이 닿았다. 붉은 듯, 서늘한 빛을 띠고는 맞닿은 뺨 너머로 그의 맥박이 느껴지는 것도 같았다. 스가는 뭉그러지는 충동과 피어나는 열기 사이에서 눈을 감았다. 그의 팔이 아카아시의 등을 감싸 쥐었다. 망설임이 손끝에 묻어났다. 스가는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카아시.”

 

.

 

안아줘.”

 

서늘해진 몸을 꽉 끌어안은 채. 스가는 더운 숨을 쉬었다. 비늘처럼 일어나는 충동을 모조리 잡아 뜯으며 긴 어둠을 견디겠다. 그가 있기에, 가능할 것도 같았다. 빗소리가 아득하게 멀어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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