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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하이큐

[보쿠로] 여름 주말

잉티 2017. 7. 2. 01:57


[보쿠로] 여름 주말

 

  

아스팔트가 끈적끈적하게 녹아내리는 여름이다. 장마가 지나간 뒤로 무더위가 기승이었다. 불금을 정말로 불타는금요일로 보낸 쿠로오는 길바닥에서 꾸역꾸역 놀고 걷느라 기진맥진한 몸으로 거실에 드러누웠다. 맥주 한잔의 정취, 라고 불렀지만 사실 노상 음주였다. 한 손에 맥주캔을 든 채 슬슬 돌아다녔는데, 익어가는 열대야에 김빠진 맥주는 미지근해지고 길거리 음식들은 뜨끈한 열기에 푹푹 쪄들어가는 금요일 밤이었다.


그리고 다시 아침. 숙취에 멍한 정신으로 일어난 쿠로오는 조금 전의 문장을 정정했다. 아침이 아니라 오후다. 새벽부터 지금까지 내리 곯아떨어졌던 모양이었다.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붙잡은 쿠로오는 멍하니 알림을 확인하다가, 구르듯 침대에서 내려왔다.


약속!


그는 반쯤 흘러내린 반바지를 꿰어 입고는 거실로 나갔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주방에 있던 그의 연인이 고개를 돌렸다.


이제 일어났어?”


보쿠토의 질문에 쿠로오는 침을 삼켰다. 예매한 영화는 오늘 12시였다. 지난 월요일에 잡은 약속이었다. 캘린더 알람, 분명 맞춰두었는데……. 쿠로오는 무심결에 나가려는 변명을 삼켰다. 술이 웬수다, 정말이지.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박박 긁다가, 손끝을 꼼지락대다가,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밥부터 먹어. 영화표는 취소했어.”


쿠로오가 무어라고 입을 떼기도 전에 보쿠토가 말을 덧붙였다. 쿠로오는 미안이라고 우물거렸다. 보쿠토는 대답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제 양심을 움켜쥐는 것 같았다. 그는 계란국을 푸고, 생선 통조림을 열고, 저번에 사두었던 젓갈을 접시에 담아 밥을 먹었다. 뜨거운 계란국을 후루룩 삼키는 동안 보쿠토는 어딘가로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침실에 들어간 모양이었다.


화났나? 화났을까? 아무래도 화났겠지?


쿠로오는 애꿎은 밥알만 푹푹 펐다. 여름 훈련으로 바쁜 보쿠토가 겨우 낸 시간이었다. 몇 주째 얼굴만 보다가 오늘에서야 잡은 약속인데. 멍청한 쿠로오 테츠로. 쿠로오는 하얀 쌀밥을 꾸역꾸역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울 것 같았다.


그는 다 먹은 밥그릇을 개수대에 놓았다. 보쿠토가 거실의 에어컨을 켜는 소리가 들렸다. 우우웅, 소리를 내며 벽에 달린 에어컨이 더운 공기를 헤집기 시작했다. 쿠로오는 힐끔 보쿠토의 눈치를 살폈다. 평소와 다르지 않은 것 같은데, 다르지 않은 게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할수록 머릿속만 엉켰다. 어젯밤의 술기운 아직 깨지 않은 걸까.


쿠로오. 여기 와.”


보쿠토가 쇼파에 앉아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렸다. 제법 진지한 모양새였다. 쿠로오는 쭈뼛거리지 않으려 애쓰며 그의 옆에 앉았다.


뭔데?”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긴장한 거, 눈치챘으려나. ‘어쩌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 몇 주간 대화다운 대화를 할 시간조차 없었으니까. 여름의 날씨는 덥고 습했고, 어느 순간부터 쿠로오는 그를 끌어안지 않았다. 그러고 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리고 보쿠토 역시, 마찬가지라는 것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들은 전조가 아니었을까.


목이 마른다. 쿠로오는 단정하게 자른 손톱을 만지작거리며 보쿠토의 얼굴을 살폈다. 그의 눈이 곧바로 보였다. 잠깐동안 시선이 마주쳤다. 쿠로오가 가장 사랑하는 그의 눈동자는 고요했다. 찰나의 시간이 끝없이 늘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의 눈가가 서서히 휘어졌다. 보쿠토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영화, 같이 보자구.”


그가 리모컨을 쥐었다. 버튼을 몇 차례 누르자 익숙한 포스터가 떴다. 언제 사둔 건지, 오늘 보기로 했던 영화가 이미 결제되어있었다. -영화관 동시상영-. 쿠로오는 멍한 눈으로 화면에 뜬 포스터 아래의 배너를 읽었다.


영화…….


말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쿠로오는 무언가 말하려고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다물기를 반복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했잖아, 이거.”


표 취소하고 저녁 시간 걸로 다시 예매하려고 했는데 전부 차 있는 거 있지? 주말이라 그런가. 남은 자리도 1인석 밖에 없고. , 시작하기 전에 음료수 가져오자. 맥주 마실래?


보쿠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쿠로오는 그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보쿠토의 시선이 제 얼굴에 닿았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음료수 가져올게.”

맥주는?”

그것도.”


쿠로오는 냉장고 문을 열었다. 차가운 기운이 얼굴 위로 훅 끼쳤다. 그는 맥주와 사이다와 마른오징어를 들었다. 차가운 캔을 움켜쥔 탓에 손끝이 얼어붙었다. 냉장고 문을 닫기도 전에 주방으로 온 보쿠토가 사이다 두 캔을 그의 손에서 빼냈다.


떨어뜨리겠어.”


그는 과자를 두어 개 품에 챙기더니 냉동실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입에 물었다.


으그 흐느브으 으느.”

뭐라고?”


쿠로오가 되물었다. 쇼파로 뛰다시피 달려간 보쿠토가 테이블 위에 과자를 늘어놓고는 입을 열었다.


아이스크림 하나밖에 안 남았다고. 이거 나 먹어도 돼?”


쿠로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맥주를 따고 오징어를 손끝으로 슬슬 찢어놓았다. . 버튼을 누르자 영화가 시작했다. 배급사의 경쾌한 음악이 울려 퍼졌다. 조금은 뻔한 가족 영화였다. 인물들이 하나둘 등장했다. 보쿠토는 몸을 숙여 과자에 자꾸 손을 뻗더니 그게 번거로운지 쇼파 아래로 슬금슬금 내려갔다. 그는 쿠로오의 무릎 사이를 파고들었다. 그의 동그란 정수리가 곧장 내려다보였다. 쿠로오는 차분하게 가라앉은 그 머리카락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 직장이라는 게 다 그렇지.

- 그래서 계속 다니겠다는 거야?


외국 배우들의 목소리 아래로 자막이 깔렸다. 영화는 잔잔한 배경음악이 흐르고 있었다. 우우웅. 원래부터 이 집에 붙어 있던 에어컨은 영 시원한 바람을 내지 못한 채 미적지근하게 돌아갔다. 바깥보다는 낫지만 그렇다고 시원하지도 않은. 딱 그만큼. 쿠로오는 조금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서 날숨을 뱉어냈다. 보쿠토는 아이스크림의 비닐을 벗기고 있었다. 색소를 넣은 소다 맛 하드가 그의 입안으로 들어갔다. 쿠로오는 문득, 고개를 숙여 그의 머리에 코끝을 맞대었다.


미안.”


그의 말은 조용한 영화 사이로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 보쿠토가 아이스크림을 문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쳤다.


?”

미안해. 오늘 약속 못 지켜서.”


쿠로오는 그의 이마에 짧게 입을 맞췄다. 조건반사처럼 보쿠토의 콧등이 찡긋거렸다. 쿠로오는 입술을 올렸다. 그것 역시, 쿠로오가 사랑하는 것 중 하나였다. 보쿠토는 쿠로오와 시선을 맞추며 씨익 웃었다.


데이트라면 지금 하고 있으니까 괜찮아.”


아아, 정말이지.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애인이라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그는 손을 뻗어 보쿠토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물었다. 이가 시리도록 차갑고, 달고, 시원했다. 그는 몸을 숙였다. 영화배우들의 목소리가 카페의 배경음악처럼 무심하게 흘러갔다. 쿠로오는 보쿠토와 입을 맞췄다. 혀와 더운 숨이 섞이고, 익숙한 체온이 뒤엉키는 감각. 그의 입안에서 저와 비슷한 소다 맛 아이스크림의 맛이 났다. 달다.


보쿠토는 어느새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쇼파 위로 올라온 채였다. 팔을 붙잡은 건 자연스러운 순서였다. 쿠로오는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낡은 에어컨이 미처 솎아내지 못한 더위의 파편들이 공기를 눅눅하게 만들었다. 아니,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겠지. 쿠로오는 웃으며 생각했다. 조금 뜨거운 체온은 여름과 어울렸다. 약간의 땀과 날숨. 잔열처럼 일어나는 불쾌함은 접촉으로 다시 흐려지고, 이성과 함께 무너져 내렸다. 그리고 남은 것은 시선뿐이다.


여름 햇살을 닮은 눈동자.


쿠로오는 홀린 듯 그 눈을 바라보았다. 영화는 무슨 장면인지, 피아노 선율이 흘렀다. 제법 감성적이었다. 쿠로오는 보고 싶다고 흘러가듯 말했던 그 영화에는 한 줌의 시선도 주지 않은 채, 입술을 열었다. 그 안에는 붉고 더운 혀가 가지런했다. 보쿠토의 단단한 손가락이 쿠로오의 배 위에 닿았다. 쿠로오는 그를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코타로.

 

미지근한 에어컨이 시끄럽게 돌아가는, 어느 무더운 여름 주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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