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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게히나] 죽음과 맞닿은

 

 


엄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돌아선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실밥이 조금 드러난, 낡은 붉은색 원피스가 기억에 남았다.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입던 옷이었다. 처녀 시절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던.

 

잘 있으렴, 아가.

 

그녀는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따뜻한 입술과 희미하게 풍기는 화장품의 냄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

 

 

유쾌하지 못한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희미하게 바랜 기억이 유난히 꿈속에서만 선명했다. 흐릿한 부분은 상상인지 무의식인지 모를 것들로 채워졌다. 히나타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닿았다.

 

일어났군.”

 

카게야마의 목소리였다. 히나타는 그를 바라보았다.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채, 셔츠와 자켓을 갖춘 정장 차림이었다. 손목에는 파텍 필립의 리미티드 에디션이 채워져 있었다. 은색의 보디가 형광등 아래서 빛났다. “.” 히나타는 잠에서 덜 깬 목소리로 대꾸했다.


일이라도 있어요?”

 , 출장. LA에 다녀올 거야.”

언제 와요?”

모레.”

 

그렇구나. 히나타는 하얀 시트를 끌어안았다. 카게야마는 붉은 넥타이를 내밀었다. 히나타는 손을 뻗어 넥타이를 카게야마의 목에 둘렀다. 하얀 셔츠와 붉은 넥타이가 기묘하게 어울렸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히나타에게 닿았다. 히나타는 얼굴을 붉혔다. 작은 손가락이 능숙하게 넥타이를 묶었다.

 

요새 이상한 이야기가 들리던데.”

뭔데요?”

경찰 쪽 움직임이 심상치가 않다고 말이야.”

 

멈칫. 히나타의 손가락이 멈추었다. 그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위험한 거예요?”

글쎄. 이쪽에 정보원이 있는 모양인데. 누구인지는……곧 알게 되겠지.”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며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히나타는 그의 넥타이를 단단하게 조였다.

 

조심해요.”

그래.”

 

히나타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카게야마는 몸을 숙여 그의 이마에 키스했다. 따뜻한 입술과 희미한 바디 샴푸의 향이 풍겼다. 문득 그 모습이 지난밤의 꿈과 겹쳐졌다. 히나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 하고 탄식인지 한숨인지 모를 소리가 흘러나왔다. 카게야마는 낮게 웃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비틀어 입술을 맞추었다. 뜨거운 혀가 뒤섞였다. 그는 이내 떨어졌다. 히나타는 옅게 웃었다.

 

 

***

 

 

히나타는 꽉 조여 맨 넥타이를 끌렀다. 맨해튼의 번화가, 낡은 전화 부스에 기대어 서서 그는 주변을 살폈다. 따르릉. 신호가 이어지고 있었다. 늦어. 히나타는 눈살을 찡그렸다. 긴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Delta, echo, charlie, oscar, yankee. 6, 2, 1.”

“Charlie, romeo, oscar, whisky. 체크. 말해, 디코이(decoy).”

눈치챈 것 같아. 연락 줄일게. 행동을 늦춰. 시간을 바꾸거나, 1, 2주 뒤로.”

알겠어. 조심해.”

 

……그리고,” 히나타가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지만 전화는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그는 빠르게 전화 부스를 빠져나와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갔다. 차가운 가을바람이 옷깃 사이로 파고들었다.

 

 

***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무엇 때문이라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그저 예감이었다. 직감이 맞았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카게야마의 귀가가 늦어졌다. 히나타는 초조하게 책상을 두드렸다. 고요한 회의장의 가운데, 톡톡 소리만 이어졌다. 핸드폰의 액정이 반짝 빛났다가 꺼졌다. 히나타는 핸드폰을 확인했지만 그저 스팸 메일이었다. 그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카게야마는 웬만해서는 늦은 적이 없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에야 회의장의 문이 열렸다. 히나타는 자신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방 안에 요란하게 울렸다. 사람들도 하나둘 일어나 고개를 숙였다. 히나타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게야마의 셔츠 한쪽이 찢어져 너덜너덜했다. 팔뚝에 붕대를 감은 것이 얼핏 보였다. 다친 모양이었다. 카게야마는 상석에 앉았다. 그의 뒤를 따라 몇몇 조직원이 들어왔다. 카게야마가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잡아.”

 

그들이 성큼성큼 걸어왔다. 순식간에 히나타가 팔이 붙잡힌 채 무릎 꿇려졌다. 이거였나. 불안한 예감이. 목이 탔다. 카게야마의 차가운 시선이 내리꽂혔다. 그는 평소처럼 매혹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쇼요.”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두피가 뜯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 보스…….”

사랑스러운 쇼요. 널 믿고 있었는데 말이야.”

 

회의장이 소란스러워졌다. 카게야마는 그의 뒤를 따라온 조직원에게 눈짓했다.

 

무라세 제이(Murase Jay), FBI 조직범죄전담반 요원입니다. 7살에 일본에서 애틀랜타로 입양된 후, 프린스턴을 졸업하고 사무국에 들어갔습니다. 사와무라 선임요원의 지휘 아래, 4년 전 조직에 잠입했습니다.”

 

히나타는 이를 악물었다.

 

보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

 

, 하는 소리와 함께 고개가 돌아갔다. 뺨이 얼얼했다. 입 안쪽에서 비릿한 향이 훅 퍼졌다. 히나타는 고개를 숙였다. 카게야마는 억지로 그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거짓말 하지 마.”

카게야마…….”

그래, 넌 나를 끝내, 토비오라고 불러주지 않았지.”

 

카게야마는 거칠게 그의 머리채를 놓았다. 드러난 이마가 찬 바닥에 부딪혔다. 상처보다 이른 공포가 신경을 장악했다. 무릎이 떨려왔다. 그의 구두가 히나타의 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억눌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철컥. 총알이 장전되는 소리였다. 보이지 않았지만 알 수 있었다. 심연을 닮은 검은 총구가 자신에게 향해 있다는 것을. 히나타는 입술을 열었다. 그러나 그가 무엇을 말하기도 전에, 카게야마가 말했다.

 

안타깝게도 나는 네 속살임을 진실로 사랑했는데.”

 

그의 목소리는 잘게 떨렸다. 히나타는 문득 그의 얼굴을, 눈동자를 보지 못한다는 것이 너무나도 안타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개를 돌려 시선을 마주하고 싶었다. 언제나 고요하지만, 애정이 묻어나던 그 시선이 떠올랐다.

 

“쇼.”

 

이를 악무는 듯한 부름이었다. 머리를 짓누르고 있던 구두의 무게가 멀어졌다. 카게야마가 몸을 숙여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히나타의 손등 위를 덮어 깍지를 꼈다. 약간은 서늘한 체온이 느껴졌다. 그가 유난히도 손끝이 차갑던 것이 기억났다. 다정한 접촉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다. 카게야마는 히나타의 작고 단단한 손가락을 움켜쥐고 손등을 향해 꺾었다.

 

아악……!”

 

주황색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확장되었다. 히나타는 신음을 토해내며 몸부림쳤다. 그의 등을 카게야마의 무릎이 짓눌렀다. 비정상적으로 꺾인 손가락의 끝이 움찔, 움찔 떨렸다. 히나타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흐윽, , 으으.”

 

카게야마는 드러난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그는 두 번째 손가락을 쥐었다. 히나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우드득. 뜨거운 피가 신경을 타고 퍼지는 듯한 고통. 히나타는 짐승처럼 허덕였다. 뱃속에서 태어난 낮은 울음소리가 입술 사이로 흘러나왔다.

 

다음.

그리고 다음.

 

한 손이 완전히 뭉개지고 카게야마가 다른 쪽 손을 쥐었을 때, 히나타는 더 이상 소리를 지르지 않았다. 색색거리는 바람 소리만이 가끔 터져 나왔다. 눈가가 뜨거웠다. 시야가 뿌옇게 일렁였지만 눈물은 고인 채 떨어지지 않았다. 카게야마는 이전처럼 너무나도 다정하게 손을 잡아왔다. 그리고 그 끝에 고통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히나타는 그 작은 접촉을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그가 결국 카게야마에게 빠져버렸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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