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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숲속의 마법사

 

 

 

 

대륙의 동쪽 끝, 경계의 숲에는 마법사가 살고 있다고들 했다. 그는 아주 오래전 그 숲이 만들어질 때부터 있었던 마법사였다. 누군가는 새하얀 수염의 할아버지라고, 누군가는 아주 젊은 미녀라고 말했지만 마법사의 얼굴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긴 시간이 지나는 동안 숲의 마법사는 용과 거인과 신들의 이야기와 함께 사람들의 현실 속에서 잊혀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 이름은, 늦은 밤 어린아이의 머리맡에서나 간간이 나오게 되었다.

 

 

 

삐이-!

 

주전자가 시끄럽게 울었다. 옅은 갈색 머리카락의 남자는 하품을 하며 손가락을 튕겼다. , 소리와 함께 불이 꺼졌다. 그는 소년도 청년도 아닌 그 중간쯤의 얼굴을 하고, 분홍 파자마를 입고 있었다. 슬리퍼를 느리게 끌며 젊은 남자는 녹차를 마셨다.

 

창밖에서는 산새가 울고, 느지막한 햇살이 발가락을 간질이는 아침이었다. 바람을 타고 서늘한 겨울 냄새가 났다. 이른 겨울의 향이었다. 곧 숲에는 눈이 올 터였다. 남자, 야쿠는 빈 잔을 내려놓고 일어났다. 겨울준비는 바쁘다. 근방을 한 바퀴 돌면서 눈 때문에 마법이 무너질 곳은 없는지 살펴야 하기 때문이다. 집 근처는 마법 때문에 따뜻하지만 바깥의 숲은 춥고 어두웠다. 그는 이번 겨울동안 집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기로 결심한 터였다. 지난겨울, 호기심에 멀리 나가본 뒤로 호되게 감기를 앓은 탓이었다.

 

야쿠는 셔츠 위에 두꺼운 망토를 걸쳤다. 단단한 신발을 신고 물통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나뭇잎 사이로 찬란한 햇빛이 모래알처럼 흩뿌려졌다. 그는 가볍게 걸음을 옮겼다. 집 앞과 북쪽 절벽, 샘의 마법을 확인한 야쿠는 큰 바위를 향해 걸어갔다. 그의 뒤를 따라 조그마한 빛무리들이 벌새처럼 파닥였다.

 

어라.”

 

바위에 새겨진 마법을 확인하던 야쿠는 고개를 돌렸다. 나무들 사이로 낯선 인기척이 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만한 소년 하나가 웅크린 채 모습을 드러냈다. 얇은 겉옷 사이로 맨발이 드러났다. 소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낯설고 기이한 것을 보듯 야쿠를 바라보았다. 길게 늘어진 은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다. 야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 외지에 찾아온 인간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소년은 입술을 버끔거리더니 야쿠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가늘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날카로운 엄니가 드러났다. 야쿠는 소년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솟은 귀, 아몬드형 눈동자. 수인(獸人)이었다. 야쿠는 소년의 입 안으로 손가락을 넣어 엄니를 만지작거리다가 얼굴을 찡그렸다. 소년이 이를 세운 탓이었다.

 

!”

 

찔린 손끝에 동그랗게 붉은 피가 솟아올랐다. 그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이걸 데려가, 말아?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지도 의문이었다. 숲의 끄트머리에서 그의 집까지는 거의 일주일을 꼬박 걸어야 하는 거리였다. 소년의 머리카락은 눈부신 은발이었지만, 먼지와 흙으로 더러웠다. 맨발은 붉고, 손가락은 풀물이 들어있었다. 야쿠는 소년을 바라보았다. 지금 돌려보낸다고 해서 길을 찾아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애초에 경계의 숲에는 길이라는 것이 없기도 했다. 그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소년의 손을 붙잡았다.

 

가자.”

 

소년은 말똥말똥 야쿠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이 마치 어디로?’라고 묻는 것 같았다. 야쿠는 덧붙였다.

 

내 집으로.”

 

 

-

 

 

내 이름은 야쿠 모리스케. 야쿠라고 불러.”

 

야쿠는 옷장에서 소년이 입을만한 옷을 찾으며 그렇게 말했다. 다행히 체구가 별로 차이 나지 않아 옷을 고칠 필요는 없었다. 소년은 딱 야쿠만한 키였다. 야쿠의 말에도 소년은 대답이 없었다. 말을 못하는 모양이었다. 수인들이 빨리 자라는 걸 생각하면 소년은 아주 어린 것 같았다.

 

이름. 몰라?”

 

소년이 고개를 기울였다. “아냐, 됐어.” 야쿠는 고개를 저었다. 치렁거리는 머리카락과 지저분한 몸부터 정리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는 소년을 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야쿠는 리에프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손가락을 튕겼다. ! 머리카락이 단숨에 짧아졌다. 그는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대충 모양새를 확인했다.

 

미용을 배운 적이 없어서 엉망이네.”

 

짧은 은발은 목덜미에 닿을락 말락 했다. 동그란 두상이 드러났다. 야쿠는 소년의 얇은 겉옷을 벗기고는 따뜻한 물을 부었다. 소년은 눈을 꼭 감고 몸을 움츠렸다. 마법사의 손짓에 따라 비누가 몸 구석구석 거품을 냈다. 야쿠는 두 손으로 소년의 머리카락을 문질렀다. 소년은 불편한 듯 낑낑거렸다. 성마른 등골을 따라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손끝에 진 풀물이 가시고 머리카락에 윤기가 흘렀다. 야쿠는 커다란 수건을 들고 와 소년의 머리 위에 덮었다. 소년은 낯선 것을 보듯 수건에 얼굴을 파묻었다.

 

야쿠는 소년에게 노랗고 복실복실한 잠옷을 입혔다. 소년은 불편한지 연신 손끝으로 옷가지를 만지작거렸다. 야쿠는 소년의 두 뺨을 붙잡았다. 소년은 눈을 깜빡이며 야쿠를 바라보았다.

 

사흘 뒤면 눈이 온다. 숲의 바람에서 매서운 북풍의 기운이 느껴졌다. 마법사의 직감은 단순한 직감이 아니었다. 힘이 강할수록 직감은 날카로워졌다. 아주 오랜 시간은 살아온 야쿠의 직감은 일종의 예언이었다. 이번 겨울의 첫눈은 하룻밤 사이에 끝날 것 같지 않았다. 북쪽 산맥의 설룡이 오랜 수면을 깨고 일어난 모양이었다. 겨울이 가기 전까지는 소년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었다. 숲은 위험했고, 말도 깨치지 못한 어린 수인에게 가혹한 곳이었다. 야쿠는 입을 열었다.

 

리에프……. 그래, 하이바 리에프라고 하자.”

 

소년을 본 순간부터 혜성처럼 떠오른 이름이었다. “리에프.” 소년은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 이름을 되뇌었다. 야쿠는 덧붙였다.

 

사자라는 뜻이야.”

 

마법사의 언어로 지은 이름은 마법사가 가지는 두 번째 이름이었다. 이 어린 수인이 마법사적 재능이 있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이 떠올랐다는 것에는 분명 어떤 의미가 있을 터였다. 마법사는 우연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봄이 오면 돌아가는 거야, 리에프.”

 

야쿠는 리에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아몬드형 동공이 가늘어졌다. 소년은 대답하지 않았다.

 

 

-

 

 

리에프는 빠르게 커갔다. 수인의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빠를 거라고 생각하지는 못했다. 야쿠는 어느새 자신보다 한 뼘은 커진 리에프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위로 쑥 올라갔다. 이대로라면 두 뼘 차이가 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슷했는데. 어쩐지 어린것에게 진 듯한 기분이라 꿍해졌다. 리에프는 손마디가 길어지고 엄니가 날카로워졌다. 가지런한 손톱은 광물처럼 단단했다. 하나둘씩 말을 깨치기 시작해서 지금은 제법 어린아이처럼 말할 수 있었다. 어린 소년은 눈 깜짝할 새 성체가 되어갔다.

 

리에프!”

 

눈살을 찌푸린 채 외치는 소리에 리에프가 찔끔, 걸음을 멈췄다. 기껏 입혀놓은 잠옷을 전부 벗어 던진 채였다. 어찌해도 옷이 익숙해지지 않는 건지, 틈만 나면 알몸으로 돌아다녔다. 야쿠는 고개를 슬쩍 돌린 채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잠옷을 건넸다. 초반에는 이빨이며 손톱으로 갈가리 찢어놓았는데 한바탕 잔소리를 한 뒤로는 얌전히 벗기만 한다. 이걸 다행이라고 여겨야 하는 건지, 아닌 건지. 리에프가 두 손으로 잠옷을 붙잡은 채 우는소리를 했다.

 

이거 싫어. 갑갑해.”

겨울이라 감기 걸려. 아무리 집안이 따뜻하다지만 알몸으로 있을 정도는 아니야, 리에프.”

 

야쿠가 말했다. 사실 저 말은 반쯤은 핑계였다. 리에프가 자꾸만 훌러덩 벗고 다니니 야쿠는 원하지 않아도 자꾸 보게 되었다. ……리에프의 중심을. 어릴 적에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계속해서 시선이 닿았다. 키도 크고, 손도, 발도 큰데 거기라고 크지 않을 리가 없었다. 새파랗게 어린 것이. 야쿠는 속으로 뇌까렸다. 수인들은 다 저렇게 큰가?

 

그의 시선이 미묘하게 리에프를 빗겨 지나갔다. 얼른 옷 입어. 다시 한 번 말하자, 리에프가 그제야 꾸물거리며 옷을 챙겨 입기 시작했다. 리에프는 바지까지 전부 입은 후에 고개를 돌려 야쿠를 바라보았다.

 

입었어!”

 

칭찬해달라는 모양새였다. 야쿠는 어쩔 수 없이 웃으며 팔을 벌렸다. 리에프가 익숙하게 그 품에 안겼다. 원래는 머리를 쓰다듬어 줬던 것 같은데 리에프가 커진 이후로는 안는 것이 훨씬 편했다. 리에프는 야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야쿠 냄새 좋아.”

 

살갗에 닿는 숨결이 간질간질하다. 그래, 그래. 야쿠는 리에프의 단단한 등을 토닥였다. 리에프는 한참을 얼굴을 부비더니 혀를 내밀어 여린 살을 할짝였다. 낯선 느낌에 야쿠가 목을 움츠렸다.

 

, 잠깐. 뭐하는 거야!”

 

그가 리에프의 어깨를 붙잡았다. 리에프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야쿠는 이 표정을 알았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모르는 어린아이의 얼굴이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분명 사자도 고양잇과였다. 그저 서로 털을 고르듯 핥은 걸까. 저 말간 얼굴을 보고 있자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당하는 인간은 느낌이 묘하다. 야쿠는 제 목덜미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숙였다. 애써 피한 시선이 마룻바닥의 폭신한 러그에 닿았다.

 

다음부터는 말하고 해.”

 

왜 하지 말라고 딱 잘라 말하지 못했는지. 야쿠는 리에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몸을 돌렸다. 창밖에는 하얀 함박눈이 미어져라 내리고 있었다. 눈의 무게에 못 이겨 나뭇가지가 무너지는 소리가 먼 데서 들려왔다. 겨울이 한창이었다. 앞으로 한 달 넘게 그와 함께 있어야 했다. 이 작고 갈 곳 없는 집에서. 야쿠는 침실의 문을 닫았다.

 

 

-

 

 

리에프가 이상했다. 야쿠는 자꾸만 제 등을 좇는 시선을 느꼈다. 어쩐지 손끝까지 뜨끈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는 지붕을 살핀다는 핑계를 대고는 집 밖으로 나왔다. 허리까지 쌓인 눈을 손가락을 튕겨 치워버렸다. 사다리를 가져다 위로 올라갔다. 마법을 새겨둔 지붕은 눈 한 송이 없이 말끔했다. 오래된 마법진은 세월을 담아 견고하고 완전했다. 부러 살필 필요도 없었다. 야쿠는 지붕에 걸터앉았다.

 

하아…….”

 

따뜻한 숨결이 입김이 되어 식어갔다. 요즘 리에프는 몇 번이고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다가 이내 입을 꾹 다물었다. 끙끙대는 것이 눈에 선하게 보일 정도였다. 그는 두 뼘 가까이 커졌고, 갈수록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늦은 밤 이따금 사라질 때도 있었다. 아침이 되면 마주한 그에게서는 겨울바람의 냄새가 났다.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나무 위, 얼어붙은 눈이 버석버석하니 부스러졌다. 아침의 맵찬 공기가 조금씩 풀어지고 새들이 이르게 울었다. 이 계절이 끝나면 리에프는 떠날 것이었다. 완연한 봄이 찾아오기까지는 조금 더 여유가 있었지만, 완전히 큰 그에게 숲은 더 이상 위험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르게 떠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걸지도 모르지. 야쿠는 빛무리를 만들어 손장난을 쳤다. 작은 빛들이 어깨에 조르르 앉았다. 봄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건 너무 오랜만에 인간을 본 탓이다. 지난날 좁은 침대와 방에서 마주하고 있는 걸 못 견뎌했던 건, 내가 변덕스러운 탓이다.

 

먼 곳에서 겨울의 찬 햇볕이 내리쬐었다. 나무들이 서로 스치는 소리. 산짐승의 소리. 바위틈 사이로 샘이 얼음을 깨치는 소리가 났다. 언 것을 뚫고 물이 흐르듯, 또 구름을 젖히고 볕이 내리듯. 그렇게 봄은 올 터였다. 그렇게……. 야쿠는 생각을 잇지 못한 채 찬 손가락을 마주 잡았다. 찬바람에 뺨이 붉었다. 무얼 생각하려 했는지, 수면 위로 떠올랐던 단어들은 꿈처럼 녹아버렸다.

 

그는 훌쩍 지붕에서 뛰어내렸다. 땅과 마주한 신발은 한 줌 소리도 없었다. 야쿠는 따뜻한 집 안으로 들어왔다. 거실에 앉아있을 줄 알았던 리에프는 침실에도 보이지 않았다. 욕실은 고요했다. 야쿠는 집 안을 기웃거리다가 서재의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리에프가 놀라 쌓인 책을 무너뜨렸다. 와르르, 책이 카펫 위로 쏟아졌다. 리에프는 당황한 낯으로 손을 뻗어 구겨진 책들을 폈다. 야쿠의 눈치를 힐끔 살피는 것이 보였다. 서재에 말없이 들어와 혼이 날까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야쿠는 덤덤하게 리에프가 무너뜨린 책들을 정리했다. 딱히 서재에 들어오지 말라고 한 적은 없었다. 책에 관심이 없는 것 같더니 별일이었다.

 

보고 싶으면 봐도 괜찮아.”

 

야쿠의 말에 리에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야쿠는 그가 꺼낸 듯한 책들을 훑었다. 역사, 철학부터 요리, 생활, 연애서까지. 주제는 중구난방이었다. 일단 글을 가르치기는 했는데. 이거 이해하고는 있는 건가? 어느새 리에프는 미간을 잔뜩 찡그린 채 어린이 동화 - 아기 새와 멧돼지를 읽고 있었다. 제국 대법전이라도 읽는 듯한 얼굴이었다. 야쿠는 소리 없이 웃었다. 그는 서재의 문을 닫고 나왔다.

 

 

-

 

 

리에프가 책에 흥미를 잃은 건 딱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서재에서 부산한 소리가 난다 싶더니, 그가 문을 벌컥 열고 나타났다. 야쿠는 침대 위에서 편지를 읽다가 고개를 돌렸다. 리에프는 대뜸 야쿠의 양손을 붙잡았다. 그가 얼결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야쿠!” 리에프가 입을 열었다.

 

야쿠, 섹스하자.”

, 리에프. 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

 

야쿠는 당황해서 외쳤다. 생전 관심 없던 책을 열심히 들여다본다 했더니. 그동안 끙끙대던 게 이것 때문이었나? 야쿠는 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동안 마음 졸였던 것이 우스웠다. 마주한 리에프의 손가락이 조바심을 쳤다. 시선이 야쿠의 다문 입가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리에프는 야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구애하는 거래.”

 

더운 숨이 목덜미에 닿았다.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듯했다. 야쿠의 귀가 빨개졌다. 리에프가 팔로 야쿠의 등을 감쌌다.

 

야쿠가 좋아. 내 아이를 낳아줘.”

 

야쿠는 입술을 달싹였다. 온몸이 뜨끈했다. 손가락 끝까지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가라앉혔다.

 

난 남자라서 아이 못 낳아, 리에프. 그리고 섹스도 안 할 거야.”

 

말하고 나니 리에프의 흉기 같던 중심이 떠올라버렸다. 야쿠는 고개를 푹 숙였다. 미쳤지. 어떻게 그걸 넣을 수 있겠어? 매일 봐온 사람으로서 확실히 말할 수 있다. 그건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아니, 물론 리에프는 인간이 아니긴 한데, 아무튼……. 야쿠의 생각이 꼬리를 무는 사이 리에프는 입술을 열었다. 눈썹 사이를 살짝 찡그린 채였다.

 

이상하다. 이렇게 말하면 된다고 하던데.”

책의 지식이란 원래 그런 거야. 현실과 동떨어진 거라고.”

 

야쿠는 리에프를 바로 보지 못한 채 대꾸했다. 시선은 아래도, 위도 아닌 빗장뼈 어디쯤을 어중간하게 부유했다. 얼굴이 붉어진 것은 아닌지, 심장이 뛰는 소리가 너무 큰 건 아닐지. 따뜻한 물에 담근 입욕제가 색색의 빛으로 퍼져나가듯, 그 향이 가득 차오르듯. 기분이 둥둥 뜨는 것만 같았다. 돌려돌려서 자꾸만 외면하던 것을 마주한 기분이었다. 리에프는 야쿠의 복잡한 심정 같은 건 읽어내지 못한 채 눈썹을 기울였다. 여름 나무 같은 녹빛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야쿠는 내가 싫어?”

 

그는 어느새 성큼 야쿠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확 가까워진 얼굴에 야쿠가 뒤로 물러났다. 중심을 잃은 몸이 침대 위로 쓰러졌다. 리에프의 붉은 혀가 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그는 의식조차 못하는 것 같았다. 야쿠는 더듬대며 대답했다.

 

아니, 좋아. …….”

 

얼결에 나온 진심이었다. 그가 무를 새도 없이 리에프가 물었다.

 

그럼 왜?”

 

묻는 눈동자가 빛을 받아 번뜩였다. 야쿠는 처음으로 그 눈이 빛나는 것이 아니라 번뜩인다고 생각했다. 맹수의 안광이었다. 겨울 사이, 리에프는 완전히 자라서 완연한 짐승이 되었다. 문득 그가 숨기고 있을 날 선 송곳니와 단단한 손톱이 떠올랐다. 키도, 시선도, 코끝을 스치는 체향조차도 달랐다. 야쿠는 침을 삼켰다. 팽팽한 긴장이 등골을 타고 올라오기 시작했다. 공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뺨이 점차 뜨거워지는 것 같다고 느낀 순간, 야쿠는 긴장과 함께 찾아온 것이 흥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그 순간 야쿠의 허벅지에 리에프의 것이 스쳤다.

 

……!”

 

야쿠는 차마 아래를 내려다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피부에 닿는 존재감이 명확했다. 리에프는 대답을 재촉하듯 그를 보고 있었다. 야쿠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의 귓가가 새빨개졌다. 네 거가 너무 커서라고 어떻게 말해. 돌겠다.

 

리에프는 대답이 없는 야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여느 때처럼 냄새를 맡는 것뿐 아니었다. 그의 더운 혀가 살갗을 간질였다. 이로 잘근잘근 씹고 숨결을 불어넣었다. , 소리가 나게 입술을 맞추었다. 야쿠의 손가락이 리에프의 팔을 붙잡았다. 그는 구운 벽돌처럼 단단하고 눈처럼 밝았다. 리에프의 입술이 점점 위로 올라와, 여린 귓가를 핥았다. 야쿠는 그를 붙잡은 채 헐떡였다.

 

살살 할게, 야쿠. ? 정말로.”

 

야쿠, 라고 늘여 부르는 목소리가 싫지 않았다. 야쿠는 흥분에 젖은 눈가로 리에프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미 제 것을 허벅지에 비비고 있었다. 뜨거운 살덩이가 천 너머로 느껴졌다. 야쿠는 못 이긴 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인간의 것인데 설마하니 죽겠냐는 생각이었다. 그의 허락에 리에프가 눈을 접으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야쿠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야쿠, 좋아해.”

 

그 예쁜 얼굴에 야쿠는 정신이 빼앗겨버렸다. 심장이 정신없이 뛰고 뺨이 붉어졌다. 역시 그가 좋았다. 리에프의 손가락이 야쿠의 분홍색 실내복을 벗겼다. 상의가 말려 올라가고 바지가 순식간에 벗겨졌다. 드러난 맨살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그러나 한기를 느낄 새도 없이, 리에프의 손가락이 허벅지 사이를 지분거렸다. 그 뜨거운 손가락에 야쿠는 수치와 흥분으로 엉망이 된 얼굴을 감췄다. 길고 마디가 도드라진 손가락은 입구를 배회하다가 느릿하게 안쪽으로 들어왔다. 야쿠는 어깨를 움츠렸다. 리에프가 그의 뺨을 비볐다. 야쿠는 낯선 느낌에 멈추고 있던 숨을 천천히 되돌렸다.

 

리에프.

 

속삭임처럼 이름이 새어 나왔다. 리에프의 귓가가 기민하게 반응했다. 짐승처럼 쫑긋거리는 뾰족한 귀를 보며 야쿠는 작게 웃었다.

 


-

 

 

야쿠가 다시 눈을 뜬 건 아침이었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눈 부신 빛이 들어왔다. 움직이려던 야쿠는 비명을 삼켰다. 허리가 부러질 듯이 아팠다. 어젯밤 몇 번 했더라? 그는 이를 아득아득 갈았다. 살살한다고 말하던 리에프를 믿는 게 아니었다. 허벅지며 손가락에 힘에 하나도 들어가지 않았다. 맹수에게 발끝까지 집어 삼켜져 씹히고 난 기분이었다. 대략 비슷하긴 했다.

 

딱 한 번만 하고 밀어냈어야 했는데. 야쿠는 별 소용없는, 그리고 앞으로도 별 소용없을 생각을 하며 고개를 돌렸다. 그의 옆에는 리에프가 숨죽여 잠들어 있었다. 큰 신장과 길쭉한 팔다리가 눈에 들어왔다. 가지런한 속눈썹과 그 안에 있을 고요한 동공, 붉은 혀를 내던 입술도.

 

야쿠는 손가락을 뻗어 그 얼굴을 매만졌다. 예쁘다. 생각해보면 주웠던 그 날도 참 예뻤다. 한 번도 의식한 적은 없었지만 내심 그리 생각하고 있었나 보다. 야쿠는 소리 없이 웃었다. 이 어린 걸 어떻게 밀어내나. 리에프를 끌어안은 채 그는 다시 눈을 감았다. 좀 더 잠을 청할 생각이었다.

 

누운 두 사람의 위로 늦겨울의 햇살이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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