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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각글

[쿠로다이] #ffffff

잉티 2016. 12. 6. 21:49



그는 곡선이 없는 방 안에 살고 있다

그는 생각한다, 이 방은

정확한 각도로 오려진 유배지

 

- 속물의 방, 심보선

 

며칠 전부터 이어지던 소음이 보일러의 탓이었다는 걸 알게 된 아침이다. 워낙에 낡고 오래된 멘션이여서인지. 그만큼의 나이를 먹었을 것이 분명한 보일러는 느릿하게 툴툴거린다. 겨울 아침의 공기는 차다. 창을 열고 지난밤을 날려 보냈다. 간밤의 불면조차 날아가는 듯하다. 눈이 뻑뻑하다. 화장실의 거울을 마주한 채, 어쩐지 충혈된 것 같기도, 라고 생각하며 면도를 한다.

칫솔은 두 개였다. 모가 조금 벌어진 녹색 칫솔을 보다가 그 옆의 것을 집어 들었다. 아침을 준비하는 일은 번잡스럽지 않다. 물과 비타민 캡슐을 삼키고 얼굴을 한 차례 쓸어내렸다. 열어둔 창 탓인지 팔뚝에 한기가 인다. 창문을 닫고, 다시, 옷장을 열고. 하얀 셔츠와 파란 넥타이를 꺼낸다. 가느다랗게 은박이 들어간 디자인은 그의 취향이 아니었다. 무심코. 남자는 넥타이를 내려놓았다. 옆의 검은 넥타이를 꺼내 단단히 매었다. 코트에 목도리를 걸치고 밖으로 나왔다.

 

춥다.

 

그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연락은 여전히 없다. 번호를 바꾸었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만, 아닐 지도 모를 일이다. 먼저 연락해보겠다는 용기는 생기지 않는다. 껄끄러움. 딱 빈 공간만큼의 껄끄러움이 혀 위에 가지런하다. 하늘은 흐렸다. 눈이 올 것 같았다. 그런 이야기는 어제 뉴스에서 나오지 않았지만. 지난겨울, 함께 첫눈을 기다렸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검고 차가운 핸드폰 액정을 매만졌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고요하다. 오늘은 눈이 오지 않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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