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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기타

[데쿠캇] 외면하고 싶은

잉티 2016. 5. 27. 17:42


 

 

[데쿠캇] 외면하고 싶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봄의 입학식은 어딘가 들뜬 공기와 함께 찾아왔다. 곧게 뻗은 교정의 끝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우뚝했다. 만개한 벚꽃의 아래에서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그 녀석을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유 없는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원인조차 바래진 짜증. 손끝을 우그러뜨리며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짜증 나.


바쿠고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제 수준에 맞지 않았다. 곧 낙오할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거슬린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녀석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멍청한 코스튬을 하고는 몸을 날리는 모습이 우습다고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이유 모를 들끓음은 날이 갈수록 심해졌다. 열기는 아랫배에서, 점점 턱 아래까지 치밀어 올랐다. 혀끝이 마르고 목이 탔다. 두려움으로 흔들리던 녹색의 눈동자가 또렷이 빛을 찾아갈수록 갈증은 심해졌다.


캇쨩.


그 목소리. 거슬린다. 당장에라도 뭉개고 싶다고 생각하면서도 섣부르게 손을 뻗지 못하는 자신이 있었다. 해사하게 웃는 얼굴이, 너무나도 짜증 나서, 그래서.

 

그래서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의 자신이 낯설어졌다는 걸 알아차렸다. 뒤늦은 자각은 열화(熱火)와도 같이, 저 홀로 오롯하던 자아를 덮쳤다. 때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듯했다. 이따금 이유도 없이 숨이 막히고 열이 피어올랐다. 가슴 속이 간지럽던 것 그때쯤이었다. 그렇게 바쿠고는 첫 번째 꽃을 토했다.

 

하얗고 커다란 꽃이었다. 여린 꽃잎이 탐스러웠다. 나중에서야 그것의 이름이 모란이라는 걸 알았다. 빌어먹을 꽃. 여리고 연약한 이름조차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목 뒤가 뜨겁고 갈증이 피어오를 때면 이내 가슴 깊은 곳이 간질거렸다. 마음이 쉬이 끊어지지 않듯, 꽃은 끊임없이 피어났다. 예고도 없이 문득 치밀어 오르는 토기처럼, 입을 막고 삼키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

 

캇쨩, 괜찮아?”


미도리야가 물어왔다. 어깨에 얹어진 손을 반사적으로 쳐냈다. 마주한 신록의 눈동자에는 한 점 거짓이 없었다. 그 너머로 자신이 비쳤다. 짜증으로 일그러진, 당황이 섞인 얼굴. 습관처럼 이를 갈았다. 너무 가깝다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캇쨩……. 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귓가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건들지 마.”


날카롭게 대꾸했다. 녀석이 조금 물러났다. 바쿠고는 신경질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손끝을 꽈악 움켜쥐었다가 폈다. 목덜미가 뜨끈하다. 신열이 오르듯 입안이 더웠다. 교실을 나가는데 녀석이 뒤를 따라오는 것이 느껴졌다. 가슴께가 간질거렸다. 시발, . 욕설을 삼켰다.


캇쨩! 보건실에 가는 거라면 같이 가줄…….”


개화한 꽃이 울컥울컥 밀려 올라왔다. 미도리야의 말을 이해할 새도 없이, 입가를 틀어막은 손 틈 사이로 하얀 꽃이 쏟아졌다. 매끈한 바닥에 덩그러니 떨어진 그것이 보였다. 지독히도 이질적이었다. 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미처 숨기지 못한 마음을 훤히 드러낸 듯.


, ?”


고개를 들자 미도리야의 얼굴이 보였다. 여태까지 중에서도 가장 멍청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열기와 함께 익숙한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시선을 뗄 수 없으면서도, 동시에 치부를 들킨 어린아이처럼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좆같네.”


발치의 하얀 꽃을 짓밟았다. 단단한 신발 바닥에 여린 꽃잎이 가차 없이 뭉개졌다. 미도리야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창문을 넘어 쏟아지는 빛이 그의 얼굴에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늘지고 고요한 복도가 끝없이 길게 느껴졌다. 정적을 깨고 바쿠고는 몸을 돌렸다. 돌아선 목덜미로 지긋한 시선이 닿았다. 뜨겁다. 아니, 뜨거운 것은 뱃속이었다.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뒤엉켰다. 자기혐오와 분노와……. 그다음을 정의하는 것이 무섭다. 바쿠고는 빠른 걸음으로 긴 복도를 걸어갔다. 뒤따라오는 발걸음은 없었다. 다시 가슴 속이 간지러웠다. 코끝이 뜨겁고, 눈가가 뜨겁고. 손끝조차 열기에 녹아내리는 듯했다.


도착한 화장실의 문을 벌컥 열고, 하얀 변기 위로 꽃들을 쏟아냈다. 후드득. 물 위로 꽃들이 점점이 잠겨 들었다. 망울지기가 무섭게 꽃잎을 터트리는 꽃들이, 마치 되돌릴 수 없는 것을 보는 듯했다. . 달짝지근한 침을 뱉었다. 향기가 아직도 입안을 메운 것만 같았다. 물을 내리자 꽃잎들이 빙글빙글 돌아가며 사라졌다.


다시 나온 복도에는 그의 그림자만이 길게 드리웠다. 누구의 발소리도 없었다. 정적에 잠긴 긴 복도에 그는 오롯이 혼자였다. 웃음이 나왔다. 가슴 한구석이 빈 듯 싸한 이유를 알았기 때문에. , 소리와 함께 옆의 벽이 울렸다. 주먹이 얼얼했다. 차라리 잘 되었다.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치밀어 오르는 꽃잎을 뱃속으로 밀어 넣으며, 그는 빈 복도를 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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