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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 AU



Opium[아편]





감옥 안은 덥고 습했다. 천장이 새는 지 한 쪽 구석에서는 물방울이 똑, 똑 떨어져 내렸다. 벽에는 물이끼가 끼었다. 높고 조그마한 창문 틈으로 비치는 빛 말고는, 시간을 알 수 없는 곳이었다.


탕!


귀가 먹먹해지는 소음과 함께 뺨에 붉고 뜨거운 것이 튀었다. 석진은 몸을 달달 떨었다. 옆에서 헐떡이던 이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그는 몸을 웅크렸다. 다가올 죽음에 대한 공포가 젊은 청년의 기개를 짓눌렀다. 손이 다가오더니, 눈앞을 가로막고 있던 낡은 천이 벗겨졌다. 밝은 빛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제발……제발. 자신이 무어라 말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쓰러진 자의 피가 바닥을 타고 흘러, 발끝이 축축했다.


"살고 싶지 않아?"


제 앞의 남자가 그리 말했다. 석진은 침을 삼켰다. 공포가 등 뒤를 흠뻑 적시고 있었다. 삶에 대한 갈망이 신념을 꺾었다. 부끄러움은 찰나였다. 그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석진은 중국 상해로 보내졌다. 그는 더 이상 밧줄에 묶여있지 않았지만, 묵묵히 헌병이 이끄는 대로 움직였다. 석진이 도착한 곳은 상하이 중심부에 있는 호텔이었다. 사근사근한 얼굴을 한 여직원이 그들을 방으로 안내했다. 니시무라 소위는 헌병들을 물리고 석진만을 데려갔다. 5층, 가장 높은 층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리자 카펫을 깐 복도가 나타났다.


"고개는 숙이지 말되 공손히 대해. 묻는 말에만 답하고. 그는 번잡스러운 걸 싫어하니 함부로 움직이지 마라."


니시무라 소위의 말에 석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위는 옷자락 사이의 총을 보여주었다. 허튼 짓하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신호였다. 석진은 고개를 돌렸다. 니시무라는 문을 두드렸다. 똑똑, 노크가 끝나자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시죠."


니시무라는 문을 열었다. 석진은 그의 뒤를 따랐다. 방 안은 넓었다. 안쪽에 문이 여럿 있는 걸보니 또 다른 방들도 있는 모양이었다. 창문에는 벨벳커튼이 달려 있었다. 반쯤 닫힌 커튼 사이로 햇살이 들어왔다. 남자는 커다란 침대 위에 앉아 있었다. 침의를 입고 담배를 입에 문 남자에게서는 권태가 느껴졌다. 니시무라는 고개를 숙였다. 소위의 공손한 태도에 석진은 내심 놀랐다. 그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를 데려왔습니다, 쇼우 씨."

"오랜만이군. 소위."


후욱. 남자는 느릿하게 담배연기를 뱉어냈다. 매캐한 내가 났다.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랍을 열었다. 누릿한 봉투를 꺼낸 남자는 그것을 니시무라에게 건넸다.


"여기. 정무총감에게 전해."

"예."


남자는 다시 침대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슬몃 드러난 복사뼈가 도드라졌다. 석진은 그의 발목을 바라보았다. 남자는 입을 열었다.


"너, 이름이 뭐지?"

"염석진이라고 합니다."

"고개를 들어봐."


남자의 말에 석진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길게 빠진 눈꼬리와 가는 목선, 침의 아래로 드러난 쇄골이 나른한 분위기를 풍겼다. 침대에 드리워진 붉은 휘장이 누구보다 잘 어울렸다. 남자는 길고 가는 손가락을 매만졌다.


"나쁘지 않네. 그대는 이만 나가봐도 좋아."


남자는 소위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는 방문을 닫고 나갔다. 남자와 둘만 남은 석진은 긴장으로 목이 타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담뱃불을 끄더니 물었다.


"원래 독립군이라고 들었는데."


석진은 무어라 대답해야할 지 망설였다. 이제는 일본의 밀정이 되었다, 그리 말해야하나. 그러나 남자는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닌 듯 말을 이었다.


"종로경찰서에 있었다면서?"

"네."


흐음. 남자는 테이블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톡, 톡. 일정한 소리가 침묵을 갈랐다. 석진은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쇼우 씨는……."

"그만."


남자가 석진의 말을 끊었다. 그는 고운 미간을 찡그리고 있었다. 석진은 지레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묻는 말에만 답하라고, 소위가 그리 말하지 않던가?"


남자의 말에 석진은 혀끝을 깨물었다. 그제야 소위가 문을 열기 전 했던 말이 기억이 났다. 죄송합니다. 석진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됐어. 말하고자 했던 게 뭐지?"

"쇼우 씨는 일본 분이십니까?"

"아니. 조선인이야. 어릴 적 상해로 왔지. 아비가 이곳에 있었거든."


남자는 무료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것보다 옷이나 벗지 그래?"

"-예?"


석진은 당황한 얼굴로 되물었다. 남자의 눈가가 일그러지는 걸보니 다시 신경을 거스른 모양이었다.


"넌 왜 여기에 왔지?"

"일본의 밀정으로 조선인의 항거를 막기 위해……윽!"


남자의 손이 석진의 따귀를 때렸다. 힘이 어마어마했다. 순식간에 고개가 돌아갔다. 석진은 얼얼한 뺨을 붙잡았다. 귀가 멍멍했다. 남자는 고운 얼굴로 웃었다.


"고개 똑바로 하고 손 내려."


석진은 쭈뼛거리며 자세를 바로 했다. 남자는 그의 바로 앞에 서있었다. 낭창한 얼굴에 가려져서 그렇지, 그는 꽤나 키가 큰 편이었다. 흐트러진 침의 사이로 단단히 단련한 근육이 보였다. 남자는 석진의 턱을 붙잡아 들어올렸다. 이리저리 돌려보는 것이 꼭 상품을 품평하는 것만 같았다.


"넌 내 시중으로 온 거야. 내가 총독부로부터 널 샀거든."

"그게 무슨……."


그의 말에 석진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했다. 남자는 잡고 있던 턱을 놓아주었다. 그는 침대 위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홍란(紅亂)의 미동들은 약에 취해 달라붙으니, 정신이 멀쩡한 조선인 청년을 하나 보내달라고 했지."


석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살려달라고 빌 때만 해도 이런 곳으로 굴러들어올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무엇하지? 벗지 않고."


석진은 느리게 옷을 벗었다. 하얗게 새로 맞춘 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끌러나갔다. 이내 속옷만 남고 알몸이 되었으나, 남자는 '전부 벗어'라며 일축했다. 석진은 속옷을 붙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이건 아니야. 이건 아니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지금 남자를 쓰러뜨리고 나가면 도망갈 수 있을까? 창문으로 뛰어내린다면 가능성이 아주 없지는 않을 것 같았다. 5층이지만 밑에 무어라도 있다면야. 아니면 엘리베이터 걸을 붙잡고…….


"맹랑한 계집."


남자는 석진의 어깨를 붙잡고 그를 침대에 눕혔다. 석진은 그의 아래에서 바동거렸다. 남자는 석진을 짓눌렀다.


"도망치려 하는 게지? 옆 서랍에 총이 하나 있다. 장전도 되어 있어."

"그걸 왜 알려줍니까?"

"긴장감 있잖아. 난 위험한 걸 좋아하는 지라."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곱게 접힌 눈꼬리가 색정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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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쪽은 수위 범벅이라 나눠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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