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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이스가] 슬픔에서 깨어난




어느 날부터 세상이 점점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선명했던 사진이 세월이 지나 서서히 바래가듯, 나의 시계(視界)도 점차 바래갔다. 싱그러운 풀밭, 이른 봄의 벚꽃, 푸른 하늘과 학교의 담쟁이 넝쿨. 문득 선 건널목 앞의 신호등까지 색을 잃었다. 차츰 세상은 흑백사진처럼 변했다. 일상에 사소한 불편함이 생겼다. 크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손끝에 걸리는 것 같은 사소함. 엄마와 찾아간 시내의 병원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시신경에 교란이 생긴 것 같다며 의사가 늘어놓는 장황한 의료용어들을, 나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하며 잿빛이 되어버린 세계. 마치 어느 오래된 무성영화를 보듯 했다. 아주 늦은 밤, TV에서 흘러나오던 찰리 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연기처럼. 제목을 잊어버린 오랜 명작은 몇 년이 지나고 난 지금에서야 머릿속에서 꺼내 올려졌다. 홀로 과거에 돌아가 버린 기분이었다.


나는 금세 사소한 불편함을 극복하는 법을 배웠다. 신호등의 색을 구별하는 법과, 원하는 색의 볼펜을 찾아내는 법 같은 것. 손끝에 걸리던 사소한 불편함에서 벗어나 원래의 일상을 되찾아갔다. 색을 잃어도 배구를 하는 데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렇지만 가끔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잃어버린 파란 빛이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어라, 너, 카라스노 맞지?”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얼굴. 아오바죠사이의 주장, 오이카와 토오루였다. 그는 러닝이라도 하고 있는지 가쁜 숨을 고르고 있었다. 땀이 나는 것 같았다. 아마도 뺨은 붉게 달아올라 있을 터다.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이름이 뭐였더라. 아아, 분명 기억하고 있었는데. 상쾌 군…….”

“상쾌?”

“아아니.”


그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슬몃 올라가는 입꼬리. 접히는 눈가. 차츰 저물어가는 노을이 그의 뒤로 옅게 퍼져나갔다. 나는 노을에 잠긴 거리를 바라보았다. 분명 아름답겠지. 회색의 거리에 지난날의 기억이 덧입혀졌다. 문득 오이카와가 아, 라고 탄성을 지르며 말했다.


“스가!”


나는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스가, 였지? 아닌가? 아니었나….”


자신 없는 투로 중얼거리는 모습에 웃음이 나왔다.


“맞아. 스가와라 코우시(菅原 孝支).”

“그래, 제대로 기억하고 있었다구.”


오이카와는 자신 있게 웃었다. 땀을 흘리며 웃는 그의 얼굴 뒤쪽으로 황혼의 색감이 순간 흐려졌다가, 반짝, 하고 빛났다. 저도 모르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 붉은 잔상을 만져보려 손을 뻗었다. 그가 “스가?”라며 묻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분명 보았다. 눈을 감은 뒤 남는 햇빛의 따가운 잔상 같은 것이 아니었다. 분명, 분명 아스라이 퍼졌던 부드러운 붉은 빛깔. 무채색의 세계에서 그 빛은 마치 보석처럼 반짝였다.


“너 괜찮아?”


그가 손을 붙잡았다.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백일몽에서 깨어난 것만 같았다. 어색하게 손을 그러모으며, 말라버린 입안을 축였다. 괜찮아. 별거 아니야. 그렇게 대꾸하면서도 시선은 자꾸만 다른 곳을 향했다.


“그만 가볼게.”


헛된 희망인지, 기대감인지.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었다. 일순 퍼져나갔던 아름다운 빛무리가 아직도 눈에 선명했다. 나는 몸을 돌려 빠른 걸음으로 걸어갔다. 이미 잃어버린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되찾고 싶었다. 푸른 하늘의 빛깔, 찬란한 태양의 색. 길가에 피어있는 들꽃의 싱그러운 꽃잎 하나하나가 그립다.


그러나 바랐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역시 환상이었을까. 여전히 다채롭게 빛나는 꿈처럼, 그 잠깐의 순간도 그런 것이었을지 몰랐다. 그렇게 그 순간은 조금씩 흐려져 갔다.



***



오이카와를 다시 만난 건 대학교 2학년이 되어서였다. 배구 연합 동아리에서 만난 그는 여전히 코트의 반대편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훌쩍 커버린 그는 한층 성숙한 얼굴로 코트 위에 서 있었다. 의외였다. 그라면 분명 선수를 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던 걸지도 모르겠다. 경영학과를 다니고 있다고 했다.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아니, 분명 사회학과이든, 화학과이든 나는 마찬가지로 생각했을 터였다. 내 기억 속의 그는 배구를 좋아하고, 스파이크 같은 서브를 날리던 고등학생의 오이카와에서 한 뼘도 자라지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렇지만 이미 자라버린 그는 웃는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맞잡아 손을 흔들며, 그의 얼굴에서 이전의 기억을 찾아내려 애썼다. 더듬어가는 기억 속의 얼굴. 많이 바뀌지 않은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낯선 걸까. 마주한 손바닥의 감촉조차도 낯설기만 하다.


그의 학교는 멀었지만 우리는 동아리에서 자주 만났다. 오이카와는 조금 더 조용하고, 거리를 지켰으며, 무언가를 포기할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만 전혀 자라지 않은 것 같았다. 변함없는 잿빛의 세계에서 홀로 멈춘 시간 위를 제자리걸음 하는 나. 그때로부터 한 뼘도, 한 마디도 크지 못했다.


“무슨 생각해?”


오이카와가 물어왔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그의 눈동자가 빛을 받아서 구슬처럼 빛났다. 눈동자 색, 어땠더라? 기억은 누군가 억지로 뜯어낸 것처럼 너덜너덜했다. 색감의 기억들은 대개 그랬다. 하늘은 푸른색, 담쟁이 넝쿨은 초록색. 시간이 지날수록 불분명하고 다채로웠던 색감들은 간단하고 명료해졌다. 단어의 틀 안에 갇힌 채 상상력으로부터 점차 멀어졌다. 그래, 그의 색깔은 어땠더라? 까만색이었을까?


“나, 뭐라도 묻은 거야?”


그가 한 손으로 제 얼굴을 슥 훑어내렸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냥 좀 예전 생각.”


그는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으응. 알 수 없는 말. 불편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슨 충동이었는지, 나는 불쑥 물었다.


“있잖아, 네 눈동자, 무슨 색이야?”

“눈동자?”

“응.”


그는 빤히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은 불편하면서도 간지러웠다. 무언가 말하고 싶었지만 단어는 혀끝에 고인 채 쉬이 흘러나오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옅은 갈색.”

“좀 더 말해줘.”

“너무 연하지도 진하지도 않아. 오래된 가구를 반질반질하게 닦은 것 같은 색.”

“햇빛 아래에서 보면?”


응. 햇빛 아래에서 보면. 그는 답했다. 나는 잊어버린 기억 대신, 그의 묘사를 토대로 제멋대로 그의 눈동자를 칠했다. 나무를 닮았을까. 아니면 그보다 조금 더 어두운 고동색일까.


“색맹이라는 거, 진짜였구나. 몰랐어.”

“응, 그치만-.”


꿈은 이따금 여러 빛깔로 보인다고 말하려고 했는데, 또 그의 뒤로 색깔이 번졌다. 푸른 가을 하늘의 빛깔. 나는 놀라 또다시 입술을 벌렸다. 청명하고 말끔한 빛이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빛의 기억. 그것과 함께 고등학교 때 있었던 일이 다시 수면 위로 끌어올려 졌다. 그의 뒤에서 퍼져나갔던 노을의 빛깔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나는 그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푸른빛은 이전보다 오래 이어졌다.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마치 그와 세계의 틈새에서 새어 나오는 것처럼. 나는 또 그 빛나는 색을 잡으려 헛되이 손을 뻗었다. 그러나 하늘의 색은 손가락이 닿자, 연못의 표면이 일그러지듯 흩어져 버렸다.


“예전에도 이런 적 있지 않아?”


그가 한껏 뻗은 내 손을 맞잡았다. 순간 심장이 쿵, 하고 뛰었다. 시선이 얽혔다. 입술을 달싹이면서 말을 꾸역꾸역 밀어내려고 애쓰는 동안, 그는 맞잡은 손을 천천히 내렸다. “색이…….” “색?” 나는 고개를 저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타들어 갔다. 놓쳐버린 빛이 가슴이 새어든 것만 같았다. 이상해. 이전의 기억과 지금의 그가 제멋대로 뒤엉켰다. 나는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자각은 빛을 잃어버렸던 것처럼, 아주 천천히 이루어졌다. 우연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시선은 자꾸만 그를 쫓아갔다. 그의 너머로 물감처럼 새어 나왔던 그때의 빛을 쫓아, 그를 바라보았다. 환상처럼 흩어졌던 하늘빛을 다시 보고 싶었다. 그 시선이 더 이상 빛이 아니라 그를 바라보게 되었다는 걸 알게 된 건 일순의 자각이었다. 언제부터였다고 단언하지 못하겠다. 속삭이는 입술, 웃는 얼굴, 다정한 손끝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이따금 시선이 맞닿을 때면 불편하고 간질간질했다. 그 사소한 불편함이 열기로 바뀐 것은 대체 언제부터였나.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게, 그저 마냥 부풀고 두근거리는 것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는 언제나 조바심을 냈고, 시선이 마주치면 웃는 척 고개를 돌렸다. 이전에는 쉬이 말을 걸었지만 지금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심장은 빠르게 뛰었고,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그의 등 뒤로 빛이 번져나갔다. 하늘이 그저 푸르지 않다는 것, 담쟁이 넝쿨이 그저 초록빛이 아니라는 걸 다시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는 빛을 등진 그가 보고 싶었다. 오래된 가구를 닮았다는 그의 눈동자를.


뭉근한 짝사랑은 오랜 시간 이어졌다. 나는 그와 친해지려고 애썼지만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에는 결국 용기를 내지 못하곤 했다. 반년 동안은 동아리의 동기였지만 그다음 반년이 흐르고 나서는 친구가 되었다. 거기까지였다. 친구, 라는 단어는 높고 견고한 장벽처럼 그와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나는 차마 벽을 부술 용기가 나지 않았다.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것 같아서.


또 시선이 마주쳤다. 그저 손을 흔들며 웃었다. 자꾸 바라본다면 이상하게 생각할 거라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다. 벤치에 앉아 오이카와의 경기를 지켜보았다. 고등학생 때 마주했던 그는 정말 대단한 존재처럼 보였다. 고교 시절의 기억에는 절박함과 쓴 패배의 그을음이 묻어있었다. 기억을 뒤로 다시 마주한 그는 낯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경기를 보고 있는 순간에만큼은 이전의 그가 얼핏 겹쳐지곤 했다. 힘껏 날아올라 내리치는 서브, 냉철한 판단력, 팀원들을 끌어모으는 힘. 뛰어오른 그의 뒤로 날개처럼 색이 번졌다. 체육관 벽의 빛깔이 일순 일렁였다. 잔상처럼 흐려지는 상아(象牙)색의 날개. 나는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연습 경기가 끝나고 오이카와가 걸어왔다. 땀에 젖은 그에게 수건을 건넸다. 그는 얼굴과 목덜미를 닦으며 가쁜 호흡을 골랐다.


“수고했어.”

“어, 땡큐. 오늘은 늦게 끝났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창밖은 어둑했다. 다른 사람들은 하나둘 짐을 챙겼다. 몇몇이 같이 술을 마시자며 오이카와를 불렀다. “미안, 약속이 있어서!” 그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오이카와는 고개를 숙여 속삭였다.


“같이 술 마시러 갈래?”

“약속 있다고 하지 않았어?”

“지금 너랑 잡으려고. 왜? 바빠?”


아니, 괜찮아. 나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일견 장난스러운 얼굴로 ‘그럼 이제 정말 선약이 생겼으니까, 거짓말한 셈은 아니야’라며 손을 잡아끌었다. 체육관 밖은 쌀쌀했다. 가을이라지만 어둑한 밤의 공기는 서늘하게 식어있었다. 그와 맞잡은 손에서부터 열기가 한 뼘씩 팔을 타고 올라오는 것만 같았다. 거리에는 가로등과 가게의 간판과 희미한 달빛이 어슴푸레 비쳤다. 


배가 고프다는 그의 말에 우리는 안주를 잔뜩 시켰다. 한참 몸을 움직이고 온 그는 식사라도 하듯 안주들을 먹었다. 그가 뜨끈한 우동과 감자튀김, 소시지를 먹는 동안 나는 무료로 나온 과자 안주로 손가락 장난을 쳤다. 배가 부른 건 아니었는데 어쩐지 고프지도 않았다. 미묘한 어중간함이 허전하게 다가와서 계속 술잔만 넘겼다. 쓰고 단 술이 알콜 냄새를 풍기며 목구멍 아래로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과자를 와작와작 삼켰다. 안주도 없이 넘기는 술에 서서히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눈을 끔벅, 감았다가 떴다. 어지럽다.


“스가, 너 취한 것 같은데.”

“으으응.”


목소리가 늘어졌다. 차가운 벽에 머리를 기대고, 더운 숨을 뱉었다. 벽의 찬기가 좋았다. 이마를 갖다 대니 그림자가 지듯 눈앞이 어둑해졌다. 아니, 눈을 감은 걸까? 시간이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기분이다. ‘자는 거 아니지?’ 그의 목소리가 아득했다. 어느새 옆에 앉은 건지 그가 손을 뻗어 어깨를 붙잡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돌리니 얼굴이 가깝다. 회색. 잿빛의 얼굴. 테이블 위의 흐릿한 조명의 빛이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릴 듯했다. 나는 헤실 웃었다. 입가가 제멋대로 올라갔다.


“예쁘다.”

“응?”


그렇게 말하며 그의 뺨을 만지작거렸다. 잘생겼어. 그는 당황한 낯으로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그 모습조차도 멋있다. 술 때문인지, 너무 가까운 시선 탓인지,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콩콩거리는 소리가 저에게도 들렸다. 문득 빛이 보고 싶어졌다. 다른 무엇도 아닌 그의 빛깔이. 닿고 싶다고 느낀 건 순간이었고, 그렇게 느낀 순간 이미 닿아있었다. 맞닿은 입술은 열기로 뜨거웠다. 눈을 감지도 않은 채 시선이 맞닿았다. 무언가 잘못했다는 자각은 반 발자국 늦게 나를 찾아왔지만, 천천히 눈을 감아 외면해버렸다. 까맣게 덮인 세상 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심장박동만이 들려왔다. 술 냄새와 그의 체향이 뒤섞였다. 나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마주했다.


당황한 눈동자. 무엇을 담고 있는 것인지 쉬이 구분이 가지 않았다. 여전히 술기운으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그와 나 사이에 있던 친구라는 벽을 두드리고 있었다.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끝내 내리눌렀던 감정이 무너진 둑처럼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여태껏 내딛지 못했던 한 발자국을 충동처럼 내디뎠다.


“좋아해.”


세계가 느릿하게 흘러갔다. 시간도, 세계도, 그도. 고백은 메아리처럼 입안을 울렸다. 결국 뱉어버린 말에 혀끝이 달았다.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오이카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면서, 눈가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눈앞이 흐려지더니 울컥울컥 감정이 쏟아졌다. 뺨이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더운 열기가 식어버리기 전에 도망치고 싶었다. 더는 이곳에 있을 자신이,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그가 앞을 막고 있었다. 벽은 결국 무너졌고 마주한 벽 너머의 세계는 이상과는 달랐다.


그래. 이상과는 달랐다.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답이 없었고 나는 여전히 울고 있었다. 느리게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을 뜯어내고 싶었다. 차라리 그가 떠났으면 했다. 이 슬픔도 나중에는 그저 한때의 추억이 되어버릴 것이라는 점이 슬펐다. 결국 열병처럼 끝날 마음이었다. 죽을 만큼 아프더라도 죽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넘치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좋아…….”


그렇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는 울음과 가게의 노래가 섞여 엉망진창이었다. 어쩌면 그가 못 들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장난이라고 생각할 지도. 어쩌면. 모든 가정들을 하나씩 손꼽았다. 나는 축축하게 젖은 얼굴을 들어 다시 한 번 말했다.


“좋아해. 네가, 좋-.”


울먹이지 않으려 애썼지만 잘 되지 않았다. 눈앞이 흐려서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안 돼. 눈을 몇 번이고 깜박였다.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는데, 따뜻한 체온이 몸을 감쌌다. 그였다. 그의 손가락이 망설이듯 등을 어루만지다가 이내 꽈악 끌어안았다. 심장이 가쁘게 뛰었다.


“응. 알겠으니까, 그만 울어도 괜찮아.”


그가 속삭였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몸이 손끝에 닿았다. 눈물을 그치고 싶었지만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스가” 그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잿빛의 세계 너머로 흐릿하게 빛이 번지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숙여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좋아해. 나도.”


아. 그 말. 그 목소리. 그의 고백을 시작으로 세계가 깨어나듯 부수어졌다. 무채색으로 뒤덮인 세계에 물감이 번져나가듯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하얀빛의 조명, 붉은 태피스트리, 여러 빛깔로 반짝이는 세계. 그리고 그 가운데 선 그. 나는 울음을 감출 수 없었다. 슬픔에서 깨어나 기쁨이 된 울음이었다. 더운 눈물이 뺨을 타고 뚝뚝 흘러내렸다. 몇 년 만에 다시 마주한 빛은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오래되어 바랜 기억 속에 있던, 수만 가지의 색. 나는 그의 손을 더듬어 붙잡았다. 땀으로 젖은 손바닥이 맞닿았다. 고개를 들었다. 그의 얼굴이, 그의 눈동자가 보고 싶었다.


조명 아래에서 빛나는 눈동자를 보자, 오랜 기억이 다시 떠올랐다. 떨리는 가슴을 붙잡고 코트에 섰던 그 날의 기억. 코트 너머에서 보았던 그의 눈동자를. 그의 말처럼 오랜 가구를 반질반질하게 닦은 것 같은 눈동자는, 옅은 갈색이었지만 자주색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무어라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색이었다. 그래서 더 예뻤다. 나는 그의 손을 꼭 붙잡았다가, 떨리는 가슴으로 그를 다시 끌어안았다.


무너진 벽 너머로 그가 손을 잡아끌었다. 이상(理想)은 현실이 되었다.




+) 설정은 컬러버스 세계관을 참고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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