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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하이큐

[우시야마] 고백(下)

잉티 2015. 11. 3. 23:36




탁. 타악. 하얀 백묵과 칠판이 마주치는 소리가 고요한 교실에 울려 퍼졌다. 웅얼거리는 선생의 목소리와 이따금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소리. 정적의 너머, 어둑한 창밖으로는 하얀 눈이 소복소복 내리고 있었다. 소리 없이 내려앉은 눈들이 어느새 한 뼘이었다. 경비는 비와 쓰레받기를 들고 운동장으로 나섰다. 학생들이 걸어갈 길이 조금씩 만들어졌다. 그 위를 다시 눈송이가 덮고, 또 덮고. 몇몇 아이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아 넣은 채 바삐 운동장을 가로질러 갔다.


우시지마는 손끝으로 펜을 느릿하게 돌렸다. 하얗게 뒤덮인 운동장을 보며 저도 모르게 다른 생각을 떠올렸다. 교문 밖에서 저를 바라보던 소년. 그 단정한 가마와 까만 눈동자, 콧잔등 위의 주근깨. 추위에 떨면서도 옅게 웃던 모습이 선명했다. 야마구치 타다시-. 몇 번이고 곱씹어 낯설지 않은 이름이 다시 수면 위로 떠올랐다. 곧게 줄이 그어진 노트 위에 의미 없는 선을 죽죽 그었다. 까만 볼펜이 묻어났다. 그는 바른 글씨로 야마구치(山口)까지 적었다가, 이내 공책을 덮어버렸다.


나른한 시간의 끝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아이들이 하나둘 부스스 일어났다. 자꾸만 저를 잡아채는 소년의 생각을 뒤로하고, 우시지마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느 때처럼 오늘도 연습이 있었다. 몸을 움직이고 나면 쓸데없는 생각도 사라지겠지. 그는 답답하게 옥죄어오는 셔츠 깃을 매만졌다.


늦은 종례가 끝나고 곧장 향한 체육관에는 이미 부원들이 와있었다. 한가운데 놓인 네트와 수북이 쌓은 배구공. 우시지마는 안으로 들어가 가볍게 몸을 풀었다. 어느새 체육관은 고함으로 가득 찼다. 신발의 고무 밑창과 매끈한 바닥이 부딪혔다. 끼익. 발끝에서부터 무릎, 허리를 타고 몸 전체를 회전하여 뻗어 나가는 도약. 팔을 뒤로 뻗었다가 강하게 내리치는 스파이크까지의 과정은 마치 하나의 동작처럼 유려했다. 이미 몇천 번이고 반복해서, 완전히 몸에 익어버린 동작들이었다. 우시지마는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스윽 닦아냈다.


“후우…….”


거친 호흡을 고르며 코트 너머의 상대와 눈을 맞췄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온종일 머릿속에서 저를 괴롭히던 얼굴이 일순 흐릿해졌다. 우시지마는 손에 쥔 공을 꽉 움켜쥐었다. 빠르게 날아간 공은 퉁, 소리와 함께 바닥에 부딪혔다. 서비스 에이스. 심판의 휘슬이 울렸다.




밖이 어둑해지기 시작할 무렵에서야 연습이 끝났다. 창문 너머 붉은 노을빛이 체육관 바닥을 흥건하게 적셨다. 하나둘 뒷정리를 시작했다. 비품들을 창고에 넣고, 지저분해진 바닥을 한 번 닦아내고 나서야 정리가 끝났다. 우시지마는 체육복을 갈아입었다. 빳빳하게 다린 교복 위로 코트를 끝까지 여몄다.


“우시지마, 너 요새 좀 이상한데.”

“뭐가 말이지?”


우시지마의 뒤에 있던 세미가 말을 걸어왔다.


“조금 멍하다고 해야 하나.”

“그보다 날카로운 거 아냐? 오늘은 완전 누구 하나 죽일 것 같던데.”


옆에 있던 텐도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시지마는 조금 미간을 좁혔다. 세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저건 멍한 거라니까. 다른 데 정신이 팔려있는 거라고.”

“그래?”


텐도는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그는 자신을 향한 시선을 무시한 채 목깃을 정돈했다. 그는 가방을 멨다. 우시지마가 나가려고 하자 텐도와 세미가 뒤를 따라왔다.


“같이 가.”

“같이 가고 있잖나.”

“매너 없긴.”


우시지마의 대답에 세미가 투덜거렸다. 세 사람은 운동장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하얗게 쌓인 눈들 위로 뽀드득, 뽀드득 발자국이 새겨졌다. 발 시려. 세미가 중얼거렸다. 그는 져지 주머니에 언 손을 넣었다. 이른 저녁의 학교는 고요했다. 저 너머로 교문이 보였다. 우시지마는 문득 익숙한 인영을 보았다고 생각했다. 몇 번이고, 다시 떠올렸던 모습. 그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덩달아 멈춘 세미가 의아한 눈으로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다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질수록 확실해졌다. 짙은 초록빛 머리카락, 망설이는 듯한 눈동자. 빨갛게 얼어붙은 두 뺨. 우시지마는 그의 앞에 섰다. 야마구치 타다시. 일주일 만에 다시 보는 얼굴이었다.



-



야마구치는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책상 한편에 가지런히 올려둔 상아색 목도리가 보였다. 그는 몇 번이고 목도리를 바라보다가, 결국은 종이가방 안에 목도리를 넣었다. 이제는 자꾸만 그 종이가방에 시선이 갔다.


소년은 두 무릎을 웅크리고는 고개를 묻었다. 처음에는 그저 동경이라고 생각했다. 제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사람을 향한 선망의 감정이었다. 강하게 내리치던 스파이크와, 땀으로 젖은 얼굴, 몇 번이고 뛰어오르던 그 모습-. 저에게는 까마득하기만 했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목도리를 둘러주었을 때였을까, 아니면 함께 걸었을 때였을까. 그러나 결국 마지막으로 떠오르는 건 저를 향해 설핏 웃던 그 모습이었다. 무뚝뚝하기만 얼굴에 슬며시 웃음이 번졌을 때, 야마구치는 그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가슴이 떨렸다. 심장 깊은 곳에서부터 무언가가 점점 퍼져나가는 것만 같았다. 저릿하기도 하고, 뜨겁기도 한 감정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저 동경이 아니라, 그 이상인 것 같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시지마 씨를 좋아하는 것 같다고. 안개처럼 흐리고 어렴풋하던 감정이 그 순간 화악, 하고 드러났다. 어떻게 집까지 돌아갔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저 자그마한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쿵 뛰는 것을 손으로 꽉 움켜쥔 채 거리를 걸었다.


그리고 나서는 하루 종일 앓았다. 감기였는지, 열병이었는지 모르겠다. 침대에 누운 채 더운 숨을 뱉어내며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았다. 흐릿한 정신이 가로등처럼 깜박이는 동안 야마구치는 어릴 적의 기억을 떠올렸다. 까마득한 기억들이 하나둘 수면 위로 떠올라, 이미 훌쩍 커버린 소년을 괴롭혔다. 울음이 나올 것 같았지만 끝내 울지는 않았다.


우울은 늪처럼 소년의 발목을 붙잡았다. 부푼 기대를 품기에는, 야마구치는 자신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자신은 그에게 닿기에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우시지마 씨와 이어질 수 없다는 사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차라리 여자였다면 한 번쯤은 용기내어 보았을 텐데. 제 마음을 내뱉었을 때 그가 보낼 매몰찬 시선과 경멸이 두려웠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후련했다. 어차피 이어지지 못할 감정, 차마 흘려보내지는 못하지만 저 혼자 미욱하니 끌어안으려 마음먹었다. 어린 날의 풋사랑이라는 게 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처음 겪은 열병은 뜨겁고, 어지럽고, 몇 번이고 저를 하늘 끝까지 밀어 올렸다가 무저갱으로 떨어뜨리곤 했다.


야마구치는 목도리를 담아둔 종이가방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돌려드려야겠지. 기대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다시 그를 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돌려주겠다는 걸 빌미로 번호라도 받을 걸 그랬다. 야마구치는 문득 생각했다. 미련하게. 그는 구겨진 종이가방을 정돈했다. 야마구치는 두툼한 바람막이를 걸치고 집을 나왔다. 거리의 공기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매서운 바람이 드러난 살갗 위를 스쳤다. 그는 종이가방을 꼭 움켜쥐고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얼어붙은 보도가 미끄러웠다. 늦지는 않겠지. 야마구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라토리자와 교문 앞에 서자, 막 수업이 끝난 학생들이 쏟아져 나왔다. 야마구치는 눈동자를 데구르르 굴리며 익숙한 얼굴을 찾았다. 남들보다 한 뼘은 큰 키가 한눈에 들어올 법도 한데, 그는 쉬이 보이지 않았다. 학생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종이 한 번 더 치고 운동장이 고요해졌다. 야마구치는 교문에 기대어 텅 빈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종이가방을 움켜쥔 손가락이 빨갛게 곱아 감각이 없었다. 그는 손끝에 입김을 불었다.


우시지마 씨, 놓친 걸까.


야마구치는 종이가방 속 상아색 목도리를 바라보았다. 바보처럼 들떠서 찾아왔는데. 이따금 한 두 명씩 학생들이 나올 때마다 야마구치는 어색한 얼굴로 교문 안을 들여다보았다. 학교 안에 들어가 볼까, 싶다가도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아 교문 근처에서만 서성거렸다. 나이 든 경비가 힐끔 저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야마구치는 어색하게 웃었다. 날은 점점 어두워졌다. 겨울 해가 서쪽으로 기울고 어느새 동쪽 하늘에는 어둠이 어스름이 끼었다. 야마구치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돌아가야 하는데. 그러나 미련이 발목을 붙잡아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고 생각하기를 몇 차례. 운동장 너머로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그를 놓쳤을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하게, 야마구치는 단번에 우시지마를 알아보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오래 기다렸다고 하면 부담스러워할지도 몰라. 그냥 목도리만 돌려주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야마구치는 종이가방을 꽉 움켜쥐었다. 우시지마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는 어느새 야마구치의 앞에 섰다. 야마구치는 꼭 다물고 있던 입을 열었다.


“우시지마 씨. 목도리 돌려드리려-.”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우시지마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마구치는 당황해서 말을 더듬었다.


“아, 아니에요. 여기, 받으세요.”


그는 우시지마에게 목도리를 내밀었다. 우시지마는 상아색 목도리를 들고 물끄러미 야마구치를 바라보았다. 야마구치는 입꼬리를 올려 어색하게 웃었다. 우시지마는 입을 열었다.


“또 목을 드러내고 있군.”

“아…….”


야마구치는 허전한 제 목을 매만졌다. 우시지마는 목도리를 끌러 야마구치의 목에 둘러주었다.


“안 돌려줘도 괜찮으니까, 드러내고 다니지 마.”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우시지마의 손가락이 야마구치의 뺨을 스쳤다. 작은 심장이 팔딱팔딱 뛰는 것이 느껴졌다.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홧홧했다. 야마구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그를 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우시와카, 왜 저래?”

“별일이네.”


우시지마의 뒤쪽에서 텐도와 세미가 속삭였다. 야마구치는 못 들은 척하려고 했지만 발갛게 물든 얼굴은 어찌할 수가 없었다. 우시지마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야마구치의 손을 붙잡았다. 한참을 서 있었던 터라 손가락은 얼음장처럼 차갑게 굳어 있었다. 커다란 손마디가 저를 감쌌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서 그가 무어라고 말하는 지도 거의 못 알아들을 지경이었다.


“너희 먼저 가.”


우시지마는 미간을 좁히며 텐도와 세미에게 말했다. 둘은 묘한 얼굴로 교문을 나갔다. 우시지마는 야마구치의 손을 움켜쥐었다.


“따듯한 곳……집이 좋겠군.”

“네, 네?”


우시지마의 말을 간신히 알아들은 야마구치가 화들짝 놀라 되물었다. 싫은가. 우시지마는 무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야마구치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좋아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한 야마구치는 걸음을 옮기는 우시지마의 뒤를 쫓았다. 저벅저벅. 차분한 발걸음소리가 좋았다. 야마구치는 두 손을 꽉 맞잡았다. 손끝이 떨리는 이유가 추위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 건지 모르겠다. 우시지마의 집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오피스텔이었다. 번화가 뒤쪽에 높게 자리한 건물은 오가며 몇 번 보아 낯설지 않았다. 집에 가자고 했을 때 한 번은 거절했어야 했을까. 냉큼 이곳까지 따라온 자신이 바보 같이 느껴졌다. 우시지마가 현관문을 열었다. 야마구치는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갔다. 모던한 인테리어의 집 안은 조금 삭막하게 보이기도 했다. 으레 있을 법한 벗어둔 옷가지나, 쓰레기, 잡동사니 같은 것들조차 보이지 않았다.


“혼자 사세요?”

“그래.”


우시지마는 가방을 내려놓고는 코트를 벗었다. 거기 앉아 있어. 그는 손끝으로 쇼파를 가리켰다. 야마구치는 쇼파에 앉아 코트를 꼬물꼬물 벗었다. 아직은 공기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코코아, 타줄까.”

“앗, 네. 감사합니다.”


우시지마가 툭 던진 말에 야마구치는 몇 차례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상아색 목도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렸다. 실내니까 벗어도 될 텐데, 어쩐지 그러고 싶지가 않았다. 야마구치는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옆에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덜그럭. 주방 쪽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야마구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인상을 쓴 우시지마가 찬장을 닫는 것이 보였다. 야마구치가 다가가자 그가 고개를 돌렸다.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

“저어, 저도 도와드릴까요?”


야마구치는 찬장을 하나씩 열었다.


“이거 맞아요?”


야마구치는 두 번째 찬장에서 꺼낸 통을 내밀었다. 우시지마는 뚜껑을 열었다. 야마구치는 데운 우유에 코코아를 탔다. 머그잔에 가득 담긴 코코아는 금세 바닥을 드러냈다. 따뜻한 코코아가 들어가니 몸이 녹는 것 같았다. 발갛게 튼 손끝에 감각이 돌아오는 기분이었다. 야마구치는 쇼파에 앉아 우시지마를 힐끔힐끔 바라보았다. 그가 빈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탁, 하고 머그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어쩐지 축객령처럼 느껴졌다. 야마구치는 빈 머그잔을 꼭 움켜쥐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우시지마가 입을 뗐다.


“뭐지?”

“아, 아니에요.”


야마구치는 고개를 저었다. 둘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시계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것만 같았다. 자꾸만 땀이 나서 잔이 미끄러졌다. 야마구치는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계속되는 침묵이 껄끄럽기만 했다.


이제 가야 한다고 말해야 할 것 같은데. 야마구치는 손끝을 매만졌다. 고맙다고, 이제 가보겠다고 말하며 일어날 타이밍이었다. 계속 남아있는 거 민폐겠지. 입안이 썼다. 잠깐 신경 써준 것 가지고 저도 모르게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생각했나 보다. 손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 같은 공기. 야마구치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아한다고 말하고 싶다. 욕심이겠지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움츠리고 있던 용기가 불쑥 고개를 드는 것 같았다. 말하고 싶다. 고백하면 어떻게 될까. 고백. 그 두 글자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빠르게 뛰었다. 얼굴이 뜨거웠다. 바보같이 혼자 앞서나가서……. 그렇지만 오늘, 지금 이 순간이 아니면 앞으로 그와 만날 수 있을까.


“괜찮은 건가.”


우시지마가 무어라 말하는 것 같았지만. 야마구치는 듣지 못했다. 그의 목소리가 흐릿하기만 했다.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좋아합니다. 야마구치는 그 말을 입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보았다. 반복할수록 용기가 사그라들었다. 못할 것 같아. 바보 같다. 이렇게 가까운데, 바로 옆에 있는데.


문득, 그의 손이 머리카락을 살짝 쓸어올렸다.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이 드러났다. 야마구치는 눈을 크게 뜨고 우시지마를 보았다.


“괜찮나.”


그 말에 가슴이 울컥울컥 뜨거워졌다. 야마구치는 시야가 뿌옇게 흐려지는 걸 느꼈다. 눈가가 화끈거렸다. 아니, 눈가도, 귀도, 얼굴도 전부 뜨거웠다. 발갛게 물든 얼굴로 야마구치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일렁이는 시야 너머로 우시지마의 당황한 얼굴이 보였다. 야마구치는 잠긴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죄, 죄송해요. 울 생각은 없, 었……흐읍.”

“잠깐. 왜 우는-.”


우시지마가 야마구치의 팔뚝을 붙잡았다. 살짝 찡그린 미간, 어쩔 줄 모르는 손. 무뚝뚝해는 얼굴조차, 그 모든 것이 야마구치의 심장을 뛰게 했다. 작은 가슴이 가쁘게 퍼덕여서, 금방이라도 터질 것만 같았다. 야마구치는 소매로 눈가를 뭉갰다. 그러나 금세 다시 눈물이 얼굴을 적셨다. 야마구치는 꼭꼭 눌러두었던 진심을 털어놓았다.


“……좋아해요.”


우시지마가 입술을 굳게 다물고는 야마구치를 바라보았다. 야마구치는 그를 바로 보지 못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한번 터진 진심은 봇물 터지듯 흘러나왔다. 스스로도 어쩔 수가 없었다. 야마구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해서 죄송해요. 흐윽, 흐-.”


가쁜 호흡을 들이킨다. 눈물과 콧물로 엉망이 된 얼굴을 보여주고 싶지 않아서, 더 웅크리게 되었다. 울음을 참으려고 애써봐도 다시 눈앞이 흐려졌다. 결국은 말해버렸다. 입 밖으로 내고 나니 그 결과를 바로 볼 자신이 없었다. 당장에라도 이곳에서 도망치고 싶었다. 우시지마가 그의 팔을 붙잡고 있지만 않았더라도 정말 그랬을지 몰랐다.


우시지마의 손이 팔에서 떨어졌다. 야마구치는 움찔, 몸을 떨었다. 눈물로 축축하게 젖은 뺨을 붙잡고, 우시지마는 야마구치의 고개를 들어 올렸다. 시선이 맞닿았다.


“난 네가 좋은지 잘 모르겠다.”


그의 말에 간신히 붙잡고 있던 가슴이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았다. 울컥, 솟아오르려는 눈물을 억누르고 야마구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예상하고 있던 거니까. 우시지마는 미간을 조금 좁힌 채, 말을 이었다.


“그렇지만, 너는 조금 달라. 넌……신경이 쓰인다.”


야마구치는 다시 가슴이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가 귓가를 쿵쿵 울렸다. 작은 희망이었는데, 벌써 눈가가 뜨끈했다. 다시 눈물이 차올랐다. 울면 안 되는데. 야마구치는 입술을 꾹 다물고 참으려 했지만 눈물은 쉬이 멈추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엄지손가락으로 눈물을 닦아주었다.


“울지 않았으면 좋겠어.”


저 말을 승낙이라고 생각해도 되는 걸까. 아니, 그러고 싶다. 야마구치는 두 손을 꼭 움켜쥐었다. 그가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경멸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눈가가 뜨거운데. 어떡하면 좋을까. 정말, 그가 좋아서. 저 말이 꼭……고백처럼 들려서.


“좋아해요, 우시지마 씨. 정말, 정말로.”


야마구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얼굴, 눈물로 엉망진창일 텐데. 그러나 그런 것보다도 눈앞의 그가 좋아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펑펑 우는 야마구치를 우시지마가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어색한 동작이었다. 끌어안았다기보다는 그저 맞닿은 것에 불과했지만, 야마구치는 그의 품이 따뜻하다고 느꼈다. 닿은 체온은 너무나 따뜻해서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덤)



한참을 울고 나서야 야마구치는 겨우 진정할 수 있었다. 제 상태를 눈치챈 그는 발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저, 저 지금 되게 못생겼으니까. 보지 마세요.”


꾸벅, 숙인 고개 위로 단정한 정수리가 보였다. 우시지마는 부끄러운 듯 얼굴을 가린 야마구치를 바라보았다. 동그란 머리와 얼핏 드러난 발간 귀.


귀엽군.


그렇게 생각하며 우시지마는 옅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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