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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시x오이



말로는 전해지지 않는 것




미야기현 봄고 예선이 끝났다. 계절은 어느새 완연한 가을로 접어들었다. 선선한 바람, 단풍잎, 은행잎들이 울긋불긋 물들어, 거리는 마치 수채화 속 풍경처럼 보였다. 구름 한 점 없이 선명한 파아란 빛의 하늘도.


시라토리자와는 현 대표전에서 카라스노에게 왕좌를 건네주었다. 풀세트에 듀스까지 이어진 치열한 접전이었다. 그러나 진 것만은 틀림이 없다고, 다들 그렇게 수군거렸다. 날지 못하는 까마귀의 부활에 시라토리자와는 중심에서 한 발자국 멀어졌다. 그건 우시지마도 마찬가지였다.


올해로 3학년. 고등학교 졸업이 얼마 남지 않은 시기였다. 아마도 대학교로 진학하고 나서도 선수로서 뛰겠지만, 마지막 고교 경기라는 점에서 다들 아쉬운 모양이었다. 그러나 막상 당사자인 우시지마는 별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졌지만 다시 꺾어주면 그만이었다.


“모레, 미야기 대학과 연습시합이 잡혔다.”


감독의 말에 다들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힐끗 팀원들을 바라보았다. 이전에도 한두 번 정도 연습시합으로 맞붙어본 적이 있었다. 몸을 풀어둬야겠군. 우시지마는 배구공을 바닥에 튕기며 생각했다.



-



라커룸은 긴장과 흥분의 목소리로 가득했다. 미야기 대학과 처음 붙는 1학년들은 다들 상기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운동복으로 갈아입었다. 체육관에서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문이 열렸다. 다들 고개를 돌렸다.


“안녕하십니까, 감독님.”


우오오-. 1, 2학년들이 지르는 함성이 체육관을 가득 채웠다. 쯧. 우시지마는 낮게 혀를 찼다. 몇몇이 제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대학생 팀은 워밍업을 하기 시작했다.


“어?”


후배 중 누군가 말했다. 우시지마는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서먹한 얼굴들 사이로 낯선 이의 모습이 보였다. 우시지마는 낮게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오이카와.”

“아, 우시와카. 오랜만.”


오이카와가 손을 흔들었다. 네가 왜 여기있지, 라고 물을 틈도 없이 마치 예상했다는 듯 태연하게 대꾸한다.


“이쪽 팀 주전세터가 부상이라서 말이야. 대신 뛰기로 했어.”

“오랜만, 이라고 인사하기는 너무 근래 같은데.”

“하나하나 따지긴.”


무뚝뚝한 우시지마의 말에 오이카와가 웃으며 말했다. 그에게는 자꾸만 시선이 갔다. 대체 언제부터였을까. 아주 예전이었던 것도 같고, 올해 여름 인터하이 지역 결승전에서였던 것도 같다. 도대체 언제부터였는지 모를 일이다. 우시지마는 가볍게 서브를 날리며 생각했다. 빠른 속도로 내리꽂힌 서브는 퉁, 소리를 내며 튀어 올랐다. 받기 만만치 않은 공이었다. 역시 우시지마 선배, 라며 누군가 소리치는 것이 들렸다.


“흐응.”


오이카와가 공을 들고 그의 옆에 섰다. 능글능글 웃는 얼굴. 우시지마는 시선을 고정했다. 아오바죠사이라는 척박한 토양을 벗어난 그는, 어떻게 발전할까. 오이카와가 뒤로 물러나더니 높게 뛰었다. 쾅, 하고 내리 꽂히는 서브.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기지 않는 위치였다. 마치 스파이크 같았다. 순간 체육관이 고요해졌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를 힐끗 바라보았다. 말아 올린 입술. 그는 퍽 즐거워보였다.



-



역시 우시와카는 괴물이다. 오이카와는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생각했다. 2세트 12 : 17. 시라토리자와가 리드하고 있었다. 1세트는 미야기 대학이 따냈지만, 지금의 흐름대로라면 역전승 당하는 것도 순식간일 터였다. 우시지마는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상대의 움직임에 적응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뭉갰다.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어쩐지 점점 가뿐해지는 것 같았다. 자신의 서브 차례였다.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중압감. 그와 별개로 이성은 놀라울 정도로 차분했다. 후욱. 후욱. 자신이 내쉬는 숨소리만이 귓가를 울렸다. 오이카와, 나이스 서브!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아득했다. 오이카와는 가볍게 몸을 날렸다. 스파이크처럼 강하게 내리 꽂히는 서브. 우시지마가 팔을 뻗는 것이 보였다. 맹렬히 회전하는 공은 그의 팔을 스쳐 뒤로 날아갔다.


“좋아!”


오이카와는 주먹을 쥐었다. 서비스 에이스다. 환하게 웃던 오이카와는 문득 우시지마 쪽을 돌아보았다.


방금, 바라보는 것 같았는데.


우시지마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세터에게 무언가를 말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돌렸다.




경기는 한참을 걸려서야 끝을 맺었다. 결과는 시라토리자와의 역전승이었다. 미야기 대학팀은 혀를 내둘렀다. 비록 미야기 대학은 리베로 부재에다가 정식 세터도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고교생에게 졌다는 것이 꽤 분한 모양이었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정말이지, 달갑지 않은 상대였다. 흐름을 잡았다, 싶더니만 순식간에 몰아치듯이 점수를 따냈다.


끓어오르는 열등감.


오이카와는 우시지마를 바라보았다. 탁월한 센스, 속도, 파워. 무엇 하나 모자란 것이 없다. 굳이 꼽자면 오만한 성격 정도였다. 노력으로도 이길 수 없는 상대인가. 손에 무심코 힘이 들어갔다. 쥐고 있던 배구공이 데구르르, 굴렀다.


‘하필이면.’


배구공은 우시지마의 발치에 멈추었다. 오이카와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그가 막 허리를 굽혀 공을 주우려는 순간, 우시지마가 먼저 손을 뻗었다.


“여기.”


오이카와는 우시지마가 건넨 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의외다. 우시지마는 멀뚱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이카와는 떨떠름하게 공을 받아들었다. 드르륵, 하고 그의 옆으로 버켓이 지나갔다. 오이카와는 시선을 돌려 버켓에 공을 담았다. 마치 억지로 도망치는 것 같아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우시지마는 체육관 밖으로 나갔다. 오이카와는 일부러 미적거렸다. 네트 정리까지 돕자 1학년들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오이카와는 웃는 낯으로 손을 내저었다. 어차피 그들 좋으라고 한 것도 아니었다. 단지 우시지마와 계속 마주치는 게 껄끄러웠을 뿐. 미야기 대학팀은 먼저 돌아갔다. 오이카와는 느릿하게 고요한 복도를 걸었다. 옷을 갈아입으러 라커룸에 들어가자, 그곳에는 가장 마주치기 싫은 얼굴이 있었다. 우시지마였다. 순간,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오이카와는 의식적으로 헤실, 웃으며 얼굴을 풀었다.


“뭐야, 우시와카. 아직 남아 있었네?”

“그래.”


우시지마는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정말이지 정이 붙지 않는다. 오이카와는 의자 위에 올려둔 가방을 열었다. 지이익, 지퍼가 열리는 소리가 라커룸에 울렸다. 오이카와는 잠시 망설였다. 이렇게 불편한 분위기 속에서 옷을 갈아입느니 그냥 운동복 차림으로 돌아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오이카와가 지퍼를 다시 닫으려는데, 뒤쪽에서 우시지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옷 안 갈아입어?”

“아, 응. 그래야지.”


멍청하긴. 오이카와는 숙인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냥 간다고 말하면 됐을 걸. 아니, 아예 무시할 걸 그랬다. 무슨 좋은 사이라고 꼬박꼬박 대꾸까지 했담. 오이카와는 마른세수를 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뒤에서 우시지마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오이카와는 천천히 상의를 벗었다. 오랫동안 단련된 복근과, 그 위로 이어지는 탄탄한 근육. 그는 어쩐지 견딜 수가 없어졌다. 무엇을, 이라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었다. 다만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답답한 이 공간을. 우시지마의 시선이 자꾸만 의식됐다.


오이카와는 반팔 티 위에 져지를 걸쳤다. 끝이다. 여지껏 묵묵히 지켜보고만 있던 우시지마가 입을 열었다.


“너.”


오이카와는 못들은 척 가방을 정리했다.


“내가 껄끄러운가보군.”

“물론이야.”


오이카와는 결국 가방에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높게 달린 창문에서 햇살이 쏟아져 내렸다. 공기 중을 어지러이 떠다니는 먼지. 오이카와는 곧게 마주쳐오는 시선을 피했다. 역광 때문인지, 우시지마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긴장으로 목구멍이 죄였다.


“무슨, 너…….”


우시지마는 벽을 마주하고 오이카와에게 다가왔다. 한쪽 팔을 벽에 짚고는, 구석으로 몰아넣는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이런 궁지에 몰리는 듯한 기분, 질색이다. 그는 우시지마의 팔을 붙들었다. 그러나 우시지마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빌어먹을 괴물.


“네가 거슬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툭, 내던진 우시지마의 말에 오이카와가 눈살을 찌푸렸다. 거리가 너무 가깝다. 손 한 뼘의 거리. 시선을 피할 수조차 없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녹갈색의 눈동자. 가슴이 쿵, 쿵, 뛰는 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긴장하고 있다. 그걸 깨달은 오이카와는 얼굴을 구겼다. 제 자신이 한심했다.


“기분이 나쁘군. 이런 적은 오래간만인데.”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줬으면 좋겠는데, 우시와카.”


우시지마의 손이 이마로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뭉갰다. 기다란 손가락은 가볍게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오이카와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손가락은 이마와 머리카락 주변을 지분거리더니, 이내 뒤로 넘어갔다. 앗, 하는 사이에 머리가 뒤로 당겨졌다.


“흐읏-.”


입술이 뭉개지듯 맞닿았다. 혀가 뜨겁다. 섬세함이라고는 조금도 없었지만, 조심스러웠다. 오이카와는 눈을 미처 감지도 못한 채, 우시지마를 보았다. 그는 눈을 살짝 감고 있었다. 긴 속눈썹이, 햇살을 받아 빛났다. 파르르 떨리는 그것을 오이카와는 잠깐 동안 바라보았다. 거칠게 머리카락을 휘어잡았던 손가락이 어느 샌가 조심스레 머리를 받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정신이 없었다. 후우, 하고 우시지마가 내쉬는 숨소리가 아주 가까이서 들렸다.


우시지마는 아주 천천히, 천천히 떨어졌다. 마치 아쉬운 표정으로. 그는 약간의 혼란과, 흥분, 안타까움이 뒤섞인 얼굴로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손목으로 붉어진 입술을 훔쳤다. 이가 으득, 하고 갈릴법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어째서인지 우시지마에게 욕설을 퍼부을 수가 없었다. 욕설은커녕 대체 왜 이랬냐는 말조차 목구멍에 걸려, 도무지 튀어나오지를 않았다. 심장은 여전히 쿵, 쿵, 빠르게 뛰고 있었다. 마주한 시선에서 우시지마는 먼저 눈을 내리깔았다. 언제나 승자의 위치에 있었던 오만한 시선이 속절없이 바닥을 헤매고 있었다.


“미안하다.”


그가 먼저 말했다. 오이카와는 살짝 숙여진 고개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낮고 무덤덤한 목소리. 세상 무서울 것이 하나 없을 것 같은 오만한 목소리는 그대로였다. 그런데 왜. 왜 그가.


“너…….”


오이카와는 말을 잇지 못했다. 무얼 말하려고 했는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다만 무엇이라도 말하고 싶었다. 우시지마는 뒤로 물러났다. 그는 끝내 자신을 바라보지 않았다. 슬쩍 비켜나간 시선으로 그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사과를 건넸다.


“미안.”

“뭐가.”


그렇게 말한 건 무심코였다. 의식할 새도 없이 불쑥 튀어나왔다.


“뭐가 미안한 건데?”


우시지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입술을 뭉개는 것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빌어먹을. 그제야 욕설이 치밀었다. 그는 가방을 아무렇게나 집어 들고는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빌어먹을. 대체 뭐야. 대체…….


한참을 뛰어간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숙였다. 가쁜 호흡이 터져 나왔다. 오이카와는 한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빌어먹을. 대체 뭐나고. 그는 느리게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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