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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중이 안 된다. 우시지마는 손가락으로 펜을 빙글빙글 돌리며 생각했다. 대학교야 이미 붙은 거나 다름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공부를 소홀히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은 도무지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다. 그는 결국 펜을 내려놓았다. 후우. 낮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렇게 흔들리는 것.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자꾸만 생각이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 때, 그 라커룸에서. 작은 창문으로 햇살이 가득 들어왔다. 오이카와의 눈동자는 햇살을 받아 반짝거리고 있었다.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도. 아니, 자신은 그 때 정말 그를 기다리고 있었나? 무엇을 위해서?


우시지마 그 자신도 답을 알 수가 없었다. 다만 그가 들어온다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라커룸에서 조용히 서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자주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으니까 한 번이라도 더 본다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그와 마주했을 때, 우시지마는 견딜 수 없어졌다. 머릿속에서 누군가 자신의 이성을 엉망진창으로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보고 있으니 닿고 싶어졌다. 닿으니 삼키고 싶어졌다. 입술이 맞닿았던 순간이 떠올랐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가슴이 빠르게 뛰어서, 그에게까지 들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성이 돌아온 건 그 이후였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손끝이 떨렸다. 태연한 표정으로 있으려고 했지만 도무지 그와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가 한 대 치더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하다, 라고 간신히 토해냈다. 그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라커룸을 뛰쳐나가는 그를 따라갈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 토오루. 토오루(徹). 테츠. 관철(貫徹)의 토오루인가. 우시지마는 빈 노트 위에 그의 이름을 바르게 썼다. 그리고는 누가 볼세라 다시 지웠다. 그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게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는 고개를 들어 영어가 빼곡히 적힌 칠판을 바라보았다. 선생님의 설명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수업이 끝나자마자 우시지마는 체육관을 찾았다. 배구공을 손에 쥐자, 그제야 평정이 찾아왔다. 제멋대로 뛰던 가슴이 조금은 차분해졌다. 우시지마는 숨을 고르며 배구공을 바닥에 가볍게 튕겼다.


"우시지마 선배, 괜찮으세요?"

"뭐가."

"약간, 피곤하신 것 같아보여서……."


무덤덤하게 바라보자 후배가 말끝을 흐렸다. 겉으로 드러날 정도로 엉망인가. 우시지마는 생각했다. 그는 입을 열었다.


"괜찮아."


몸을 움직이다보면 이런 저런 생각들도 사라지니까. 그의 모습도 잠시나마 사라질 터였다. 경기 시작을 알리는 호루라기 소리에, 우시지마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무서운 집중력으로 그는 몇 번이고 스파이크를 날렸다.



-



"오이카와, 너 이상한 것 같은데."


이와이즈미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방긋 웃어보였다.


"무슨 소리야. 이와쨩. 오늘 컨디션 만땅이라구."

"괜찮은 척 하지 말고. 무슨 일인데?"


이와이즈미가 눈살을 찡그리며 물었다. 역시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와쨩을 속이기는 무리였다. 오이카와는 이온음료를 벌컥벌컥 마셨다. 목이 타들어 갈 듯한 갈증이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매니저가 건네준 수건으로 목덜미를 닦으며, 오이카와는 옅게 웃었다.


"그냥 좀. 신경 쓰이는 게 있어서."

"뭔데?"

"별 거 아니야."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면 됐어."


이와이즈미는 단번에 물러났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이런 점이 좋았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의 등을 팡, 하고 쳤다. 윽. 오이카와는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등짝이 얼얼했다.


"별 거 아니면 빨리 털어버려."

"아프다구, 이와쨩-."

"엄살은."


이와이즈미는 그렇게 말하고는 코트로 돌아갔다. 오이카와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요 며칠 간 계속해서 우시지마 생각 때문에 정신이 없었다. 그와 닿았던 순간,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했던 목소리. 그런 것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설마 날 좋아하나. 그런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아니, 사실은 꽤 몇 번이고 했던 것 같다. 말도 안 되는 가정이지만, 그게 아니라면 굳이 땀내 나는 남자와 입술을 맞출 일이 뭐가 있을까.


아, 모르겠다. 오이카와는 앞을 바라보았다. 그가 날 좋아하든 말든,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는 다짐하듯 속으로 중얼거렸다. 삑, 호각소리가 울리고 그는 몸을 날렸다.


연습 경기가 끝나고 이리하타 감독이 모두를 불러 모았다.


“다음 주 월요일, 시라토리자와와 연습 시합이 있을 거다.”


감독의 말에 순간 분위기가 술렁였다. 오이카와는 굳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이와이즈미가 힐끗,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2학년들은 저들끼리 무어라 속삭였다. 인터하이에서 보았던 우시지마의 위력을 떠올리는 모양이었다. 감독은 흐트러진 분위기를 모았다.


“자자. 너희도 알겠지만 내년이면 오이카와도, 이와이즈미도 이 팀에 남아있지 않는다. 하지만 그건 시라토리자와의 우시지마도 마찬가지야. 이번 시합은 내년의 시라토리자와를 경험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거다.”

“그럼 3학년들은 나가지 않습니까?”


이와이즈미가 물었다. 이리하타 감독은 고개를 끄덕였다.


“되도록이면 1, 2학년 위주로 시합을 벌일 생각이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쥐었다. 그를 피할 수 있다는 묘한 안도감, 그리고 그와 동시에 자조가 피어올랐다. 오이카와는 슬몃 웃었다. 그러나 모래라도 씹은 것처럼 입안이 껄끄러웠다. 감독은 몇 마디를 더 하고는 체육관을 나갔다. 오이카와는 구석에 있던 버켓을 끌고 왔다. 굴러다니는 공을 넣다가, 문득 화가 치밀어 공을 집어던졌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배구공이 벽에 부딪쳐 튕겨 나왔다.


“오-이-카-와-!”

“악!”


어디선가 날아온 공에 뒤통수를 맞은 오이카와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뒤를 돌아보니 역시나, 이와이즈미가 매서운 눈매로 노려보고 있었다.


“애들 놀라잖아! 왜 신경질이야?”

“이와쨩, 너무해…….”

“참나. 얼른 정리나 하고 나와.”


바보 이와쨩,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오이카와는 공을 주웠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아직도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는 머리를 쓰다듬었다. 후우. 흐릿한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래도 이와이즈미 덕분에 정신이 좀 말끔해진 것 같았다. 그 때의 일을 계속 신경 쓸 필요는 없을 테니까. 그래.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



월요일은 마치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성큼성큼 다가왔다. 체육관에서 스트레칭을 하던 오이카와는 이따금씩 창밖을 내다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선 학생들의 무리가 보였다. 그는 배구공을 바닥에 통, 통 튀겼다. 드디어인가.


어쩌면 우시지마가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어젯밤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 기대가 무색하게도 우시지마는 가장 앞서 체육관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190cm에 가까운 키가 훤칠하니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우시지마가 자신의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잠시 마주쳤다. 오이카와는 차마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 몰라 스트레칭을 하는 척, 눈을 피했다.


양 팀에서 3학년들이 빠지고, 1, 2학년들만으로 연습 경기가 시작되었다. 시라토리자와의 감독은 벌써 우시지마 다음 에이스를 내정해둔 모양이었다. 제법 자연스럽게 연계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의자에 앉아 시합을 지켜보았다. 역시 쿠니미는 서브 연습이 더 필요할 것 같은데. 오이카와는 아웃되어 데구르르 굴러가는 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멍하니 공을 보고 있는데, 무언가 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시라토리자와 벤치 쪽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친 우시지마가 뒤늦게 고개를 돌리는 것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가?”

“잠깐 화장실.”


마츠카와의 말에 오이카와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피하듯이, 화장실로 향했다. 경기가 한참인지라 화장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세면대에 물을 틀었다. 콸콸 쏟아져 내리는 물줄기에 손을 뻗었다. 얼음장처럼 차갑다. 오이카와는 두 손을 모아 얼굴을 씻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것 같았다. 세면대를 붙잡고 숨을 고르던 오이카와는 복도를 울리는 발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거울 너머로 우시지마의 얼굴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놀라 몸을 돌렸다.


“우시와카-.”


쨩, 이라는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키며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채 닦아내지 못한 물기가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톡. 턱 끝에서 차가운 바닥을 향해 떨어지는 물방울. 우시지마는 어쩐지 견딜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가만히 오이카와를 마주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뒤쪽의 세면대를 움켜쥐었다. 손끝이 축축하다.


“할 말이라도 있어?”


오이카와는 입에서 나오는 대로 말했다. 무어라도 말하지 않으면 공기를 짓누르고 있는 길고 진득한 침묵을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꺼낸 말이 무색하게도 우시지마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오이카와는 잠시, 먼저 나가야하는 건가 고민했다. 잠깐 망설이던 오이카와는 결국 줄곧 마음에 담아두고 있던 말을 불쑥 꺼냈다.


“나 좋아해?”


그 말에 우시지마의 입술이 달싹였다. 오이카와는 세면대 위에 살짝 기댔다. 오이카와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우시지마는 무어라 내놓는 말이 없었다. 다만 또렷이 마주쳐오던 시선이 슬몃 비켜갔다. 후우. 오이카와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우시지마가 움찔, 하는 것이 느껴졌다. 오이카와는 그를 바라보았다. 뭐야, 방금. 착각인가?


우시지마는 조금 가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눈살을 살짝 찡그렸다. 뭔가 이상한데. 언제나와는 조금 다른 것 같다. 언제나 오만하던 시선은 자신에게 닿아있지 않았다. 우시지마가 입술을 뭉개는 것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무심코 그에게 한 발자국 다가갔다. 우시지마는 퍼득, 놀라며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우시와카답지 않아.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굳게 다물린 입술, 허공을 더듬는 시선. 오이카와는 한 발자국씩 그에게 다가갔다. 우시지마는 점점 뒤로 물러나더니, 결국 타일과 등을 맞댔다. 그는 자신과 눈조차 마주치지 못했다. 내리깐 속눈썹 위로 햇살이 반짝반짝 빛났다. 오이카와는 그 모습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우시지마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거슬려.”

“-뭐?”


오이카와는 미간을 좁혔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자신을 보고 있지 않았다. 그는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네가 신경이 쓰인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살짝 벌렸다. 문득 우시지마의 손끝이 떨리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길고 투박한 손가락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우시지마는 손끝을 가리며, 주먹을 쥐었다.


“아마도. 좋아, 하는 것 같아.”


그렇게 말하는 우시지마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달랐다. 깊게 잠겨서, 저도 어쩔 줄을 모르는 목소리. 오이카와는 순간 숨이 막히는 것만 같았다. 우시지마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한 채 묵묵히 기다리고만 있었다. 조금 떨려하는 것도 같았다. 오이카와는 그의 심장소리가 제 귀에까지 울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니. 아니야.


오이카와는 이를 악물었다. 그는 눈을 감았다.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빠르게 뛰는 이 심장소리는 누구의 것일까. 긴 침묵이 흐르고, 우시지마는 느린 숨을 토해냈다. 그는 입술을 달싹였다.


“미안.”


오이카와는 순간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았다. 우시지마는 평소와도 같은 무덤덤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표정에 오이카와는 어쩐지,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는 나가려는 우시지마의 팔을 붙잡았다.


“너.”


오이카와는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돌아보는 우시지마는 언제나처럼 오만한 얼굴이었는데, 오이카와는 그보다 그의 떨리는 눈동자가 더 눈에 들어왔다. 반쯤 체념하고 있는데도 작은 기대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의 눈이었다.


“그냥 가버릴 셈이야?”


우시지마의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오이카와는 반쯤 편 그의 주먹을 바라보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손바닥에 붉게,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어딘가 아리다. 차마 거절의 말이 나오지 않았다.


머리가 복잡해서 자신이 그를 좋아하는 지는 잘 모르겠다. 당황스럽고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된 기분이었다. 그러나 잘게 떨리는 손끝으로, 떨리는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그를 보고 있자니. 이런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그저 작은 충동이었다. 오이카와는 말했다.


“널 좋아하는지는 모르겠어.”


표정을 잘 읽을 수는 없지만, 아마도 우시지마는 체념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이카와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네가 원한다면…….”


오이카와는 잠시 말을 골랐다.


“사귀어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고 생각해.”


그 말에 우시지마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러고는 곧,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오이카와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리고는 와락, 끌어안았다.


“하아…….”


느릿하게 터져 나오는 한숨에는 차마 숨기지 못한 떨림이 녹아났다. 오이카와는 당황해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우시지마는 오이카와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고마워. 그가 말했다. 오이카와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자신을 좋아한다는 게, 선명하게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조심스럽게 그의 어깨를 붙잡아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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