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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오이] 도화가 피는 날에



동양풍 AU




그건 도화가 흐드러지게 피어난 봄이었다. 사람 좋은 아비가 제 손을 꼭 붙잡고 속닥이는 말에, 눈을 반짝이며 달음박질하여 갔더랬다.

토오루, 저 대문을 넘어서면 네 신부가 될 아이가 있단다.

키도 작고 손도 작던 어린 날의 저는 들뜬 가슴을 안고 문지방을 넘었다. 그리고 그때 보았다. 사나운 눈매를 한 까무잡잡한 계집애를.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이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못생겼어.”

“……뭐?”


이와이즈미가 미간을 좁히며 되물었다.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별거 아냐.”

“별거 아니긴. 다 들었는데. 못생겼다고 그랬지, 빌어먹을 오이카와.”

“어라, 들켜버렸네-.”

“죽여버린다, 네 녀석.”


웃으며 말하는 오이카와를 향해 이와이즈미가 장창을 치켜들었다. 기다란 창이 휘익, 하고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내며 오이카와의 목 옆을 스쳤다. 오이카와는 어색한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하하, 장난이야, 장난.”


장난은. 이와이즈미는 낮게 혀를 차더니, 창을 거두었다. 주변에서 연습하던 녀석들이 킬킬 웃어댔다. 모두가 장난이라는 걸 알았다. 일상과 같은 간격이었다. 6살의 자신이 계집애라고 착각했던 꼬마는 어느새 훌쩍 커서 제국 제일의 창술사가 되어 있었다. 이와이즈미는 천으로 날카롭게 벼려진 창끝을 닦았다.


“너 결혼한다며.”

“푸흡, 뭐, 뭐……뭐어?”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던 오이카와가 사레가 들렸는지 잔기침을 했다. 멍청이.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이와이즈미가 낮게 중얼거렸다. 오이카와는 손수건으로 엉망이 된 입가를 말끔하게 닦았다. 이와이즈미는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네가 그걸 왜 알고 있, 분명 비밀-.”

“아저씨가 우리 아버지한테 신이 나셔서 말씀하시던데.”


이놈의 아버지. 아주 동네방네 소문을 내라. 오이카와는 일그러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이와이즈미는 창을 눈높이까지 들어 중심을 가늠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가볍게 휘둘렀다. 오이카와는 힐끗 이와이즈미를 바라보았다. 평소와 같은 얼굴이었다. 어쩐지 기분이 팍 가라앉았다. 그는 언제나 가지고 다니는 화려한 접선을 펼쳤다. 촤악. 비단 접선이 펴지고 흐드러진 도화가 드러났다. 접선 끝, 옥으로 만든 선추가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오이카와는 애써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 결혼 아니야. 약혼이지. 이와 쨩도 알 걸? 미유노 가문의 둘째 딸. 아주 예뻐.”


부웅, 이와이즈미의 창끝이 허공을 갈랐다. 원을 그리는 듯하다가도, 빠르게 내지르는 맹공(猛攻). 말 위에서 적들의 목을 베는 그의 창술은, 제국 내에서 따라올 자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저도 모르게 시선으로 이와이즈미의 창끝을 쫓았다. 격렬한 움직임으로 거칠어진 호흡, 들썩이는 가슴팍. 까맣고 매서운 눈동자.


“그리고?”


그가 물었다. 어? 멍하니 있던 오이카와는 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사람 좋은 웃음을 지으며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여식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걔가, 까맣고 단정한 머리가 어찌나 예쁜지 몰라, 거기에 하얀 피부에, 동그란 눈매에…….”


전부 너랑 정반대야. 짐이라고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하얗고 매끈한 손가락. 자수 같은 이야기를 듣고 있는 것도, 앉아서 차나 홀짝이는 것도. 전부 싫었다. 그렇게 말하고 싶은 것을, 입은 정반대를 말하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제 진심을 입안으로 삼켰다. 되는 대로 지껄이다 보니 어느새 제 아비가 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따라 읊고 있었다.


“아주 참하다니까, 글쎄. 그렇다고 또 마냥 순진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잠자리에서는 제법….”


당돌할지도 모르지-. 라던 아비의 말이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이로 혀끝을 뭉갰다. 아야. 아릿한 아픔이 느껴졌다. 멍청하긴. 하여간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는 아버지다. 오이카와는 힐끔, 이와이즈미의 눈치를 살폈다. 이와이즈미는 깔끔한 자세로 휘두르던 창을 우뚝 멈춘 채 오이카와를 바라보고 있었다. 입안이 바싹바싹 말라왔다. 완전히 오해해버린 것 같았다. 어색함을 모면하려, 오이카와는 접선을 살랑살랑 부쳤다.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빤히 쳐다보는 그의 까만 눈동자에서, 어째서인지 오이카와는 아무것도 읽어낼 수 없었다. 무어라고 말할까. 침묵에 못 견딜 것 같으면서도 오이카와는 문득 생각했다. 혹시, 질투하는 걸까. 자그마한 희망이 피어올랐다.


“혼약 전에 잠자리라니, 어지간히도 마음에 들었나 보네.”


짧은 침묵을 깨고 이와이즈미가 말했다. 덤덤한 목소리다. 오이카와의 손가락이 접선을 꽉 움켜쥐었다.


“소중하게 대해. 신부 될 사람이니까.”


부웅. 이와이즈미는 다시 창을 휘둘렀다. 오이카와는 접선으로 일그러진 입매를 가렸다. 그는 평소처럼 가벼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당연하지. 이와 쨩이랑은 다르다고-.”


그 말에 이와이즈미의 시선이 잠깐 오이카와에게 닿았다. 오이카와는 입술을 뭉갰다. 이와이즈미의 자세는 여느 때처럼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마치 그의 무뚝뚝한 태도를 대변하는 것처럼. 더는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오이카와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 먼저 가볼게.”

“왜?”

“왜긴. 신부가 보고 싶어서지.”


오이카와는 부러 심술은 얼굴로 말했다. 너도 어서 신부 데려오라고. 이와이즈미는 아무런 대꾸도 없었다. 오이카와는 잰걸음으로 연무장을 벗어났다. 연무장에서 어느 정도 멀어진 뒤에서야 그는 털썩 보이는 자리에 주저앉았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관심 없다고, 그런 여자. 내 신부는 분명 하지메가(家)에 있다고 했으면서 대뜸 약혼자라며 다른 계집을 데려온 아버지에게 울분이 치밀었다. 오이카와는 접선을 탁 소리가 나게 접었다. 한숨이 나왔다.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과 이와이즈미의 오해. 그 모든 것들을 제쳐 두고 가장 화가 나는 건, 그의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놀랄 것이라도 있느냐 듯 말하는 그 태도. 오이카와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검을 쥐어 딱딱하게 굳은 손바닥에는 희미한 손톱자국만이 남을 뿐이었다. 


6살, 도화가 흐드러지게 피었던 그 봄날. 그때 이후로 다른 사람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못생긴 계집이라고 생각했던 그가 사실은 사내애라는 걸 알았을 때도, 해가 지날수록 훌쩍 커가는 그를 보았을 때도 상관없었다. 잠깐이나마 그도 저와 같은 생각이길 바랐던 건, 역시 무리였을까. 오이카와는 입술을 뭉갰다. 




갔나.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툭, 그는 창끝을 내려놓았다. 창을 한껏 움켜쥔 손이 아려왔다. 약혼……. 생각해보지 않은 건 아니었다. 문신 가문으로 유명한 토오루가(家)의 유일한 무신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출세를 못한 건 아니다. 되레 유망주에 가까웠다. 그러니 사주단자를 보내는 집도 많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건 그의 생각보다 일렀다. 아직 마음을 채 접지 못했는데. 이와이즈미는 눈을 감았다.


‘그렇다고 또 마냥 순진하기만 하지는 않으니까, 잠자리에서는 제법….’


그의 목소리가 뚜렷하게 귀에 울렸다. 약혼식도 올리지 않았는데 벌써 잠자리를 가진 거란 말이지.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짓씹었다. 오이카와가 매번 잔소리를 해대는 버릇이었다.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접자, 접자, 하고서는 몇 년을 끌어온 마음이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도 모르겠다. 매번 못생겼다고 놀려대는 녀석의 어디가 좋은 걸까. 스스로에게 물어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그렇지만 이제는 정말 접어야겠지. 이와이즈미는 생각했다. 채 식지 않은 땀이 콧등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는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겨우, 이 마음을 끝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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