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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_기타

[티엔하랑] 무제

잉티 2015. 8. 15. 17:48

티엔하랑

무제.


현대 AU



늘어지는 여름날이다. 방학 보충을 하러 온 아이들은 하나 같이 옷자락을 팔락이며 더위를 몰아내려 애썼다. 에어컨은 오후가 되어야 나왔다. 털털털 돌아가는 선풍기 바람은 끈적거리는 무더위를 몰아내기에는 미약했다. 하랑은 책상에 축 늘어져 교재를 바라보았다. 손에 펜은 쥐고 있었지만 무언가를 써내려갈 생각은 없었다. 책상과 맞닿은 뺨이 끈덕하다. 창 밖에는 매미가 울어대고 있었다. 저것들은 왜 저렇게 짝짓기에 열심이람. 하랑은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생각했다. 어젯밤 새벽까지 게임을 해서 그런지, 오늘은 유난히 버티기가 힘들다.


수업 시작을 알리는 종이 쳤다. 아이들은 들은 채 만 채였다. 하랑이라고 다르지는 않았다. 무슨 시간이지. 그저 그렇게 생각하는 게 다였다. 선하품을 하고는 팔을 고쳐 베었다. 깜박깜박 졸음이 밀려왔다. 옆 자리의 짝꿍이 저를 흔들어 깨우는 것이 느껴졌다. 이번 보충 때 겨우 이름이나 익힌 아이였다.


"야, 일어나. 티엔이야."


그 말에 하랑은 꾸물꾸물 몸을 일으켰다. 책상 속에서 수학 교재를 꺼내 올려놓자마자 교실 앞문이 열렸다.


"안녕하세요."


앞자리에 앉은 누군가가 인사를 했다. 퍽 모범생인 모양이었다. 하랑은 그렇게 생각하며 턱을 괴었다. 깔끔한 이목구비에 훤칠한 키, 단단한 근육. 그는 하얀 와이셔츠의 단추를 목 끝까지 채우고 있었다. 여름인데 덥지도 않나. 하랑은 괜히 제 교복 단추를 하나 끌렀다. 문득 선생의 시선이 자신을 향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그를 보니, 착각이었던 것처럼 태연하게 교재를 넘기고 있었다.


티엔은 빡빡하게 수업을 나갔다. 다른 선생들이라면 학생들이 지친 걸 보고 이런저런 농담이라도 한 마디 던질 법 하건만, 그는 달랐다. 부정적분이니, 정적분이니 하는 말들에 아이들의 눈동자가 점점 풀려가는 것이 보였다. 책들을 쌓아두고 그 뒤에서 핸드폰을 하거나 교재에 낙서를 하는 애들도 있었다. 그 때마다 그는 단박에 알아차리고는 지적했다. 한 번을 그냥 넘어가는 일이 없었다.


하랑은 자꾸만 감기는 눈꺼풀에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그것도 한두 번이었다. 책상 한 켠에 쌓아둔 교재에 한 쪽 팔을 기대고, 그 위에 얼굴을 묻고 눈을 스르륵 감았다. 잠깐만 감는 거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이 어느새 정신이 까무룩 했다.


"김성진. 옆에 이하랑 깨워라."


티엔은 하랑이 잠이 들자마자 말했다. 하랑은 누군가 등을 세차게 흔드는 느낌에 번쩍 눈을 떴다. 눈을 깜박, 한 것 같았는데 그 사이 졸았나보다. 하랑은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또다.


선생이 또 자신을 보고 있었다. 하랑은 살짝 미간을 좁혔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하품을 입을 가리고 할 걸 그랬나? 민망하게 왜 눈이 마주쳐가지고. 그는 투덜대며 교재를 넘겼다. 꾸역꾸역 수업을 듣기는 하지만 교재는 새하얀 그대로였다. 구석에 끼적거린 낙서가 보였다. 집에 가고 싶다. 하랑은 낙서 아래에다가 집 모양을 그렸다. 아아. 집에 가고 싶다. 잠이나 자고 싶다. 수업 시간은 느리게만 흘러갔다. 시계의 초침이 한없이 느려져서 하나의 눈금과 그 다음 눈금 사이에 무한의 시간이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이걸 되게 있어 보이는 말로 뭐라고 하더라? 하랑은 딴 생각을 하며 수업을 흘려들었다.


종이 쳤다. 드디어 수업이 끝이 났다. 하랑은 쭈욱 기지개를 폈다. 이제 보충은 끝이었다. 점심 먹고 오후 자습시간이 남아 있기는 했지만, 뭐 어제도 그제도 그랬듯이 오늘도 빠질 예정이었다. 가서 푹 자고 저녁 느지막이 일어나 게임이나 할 생각이었다.


"이하랑."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고 있는데 위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티엔이었다. 하랑은 괜히 침을 삼켰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니 확실히 위압감이 느껴졌다. 그는 날카롭게 올라간 눈꼬리로 하랑을 바라보고 있었다.


"교무실로 따라와."

"저, 저요?"


당황해 목소리가 엇나갔다. 티엔은 '그래'라고 무뚝뚝하게 말하고는 교실을 나갔다. 순식간에 아이들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하랑은 입술을 깨물었다. 뭐야, 대체. 그는 가방을 챙겨 매고는 교실을 나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야기가 끝나면 바로 갈 생각이었다.


티엔은 저 먼저 성큼성큼 걸어갔다. 하랑은 빠른 걸음으로 그의 뒤를 쫓았다. 티엔이 있는 곳은 3층 교무실이었다. 이렇다 할 부서 이름도 없이 다들 3층 교무실이라고 불렀다. 사실 하랑도 3층 교무실 선생님들이 뭘 하는지 몰랐다. 티엔은 하랑이 잘 따라온 것을 확인하고는 말없이 열쇠로 교무실 문을 열었다. 좁은 교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리도 딱 세 자리뿐이었다. 티엔은 의자에 앉았다.


"저기 의자 가져와서 앉아라."


하랑은 의자를 끌고 와 자리에 앉았다. 교무실 특유의 무거운 분위기가 불편하다. 하랑은 결국 참지 못하고 먼저 물었다.


"선생님, 저 왜 부르신 거예요?"

"수업 태도가 안 좋아서 불렀다."


그가 말했다. 하랑은 저도 모르게 입을 반 쯤 벌렸다. 어이가 없다. 뭐, 졸기는 졸았으니 수업태도가 좋다고는 말 못하지만……. 태도가 안 좋은 애는 저 말고도 많았다. 수업 때마다 핸드폰을 뺏겨서 오늘 치까지 해서 다섯 번인 애도 있었다. 조는 것쯤이야 다른 애들도 다 그런 거고. 자신이 모범생이라서, 갑자기 수업태도가 안 좋아져서 걱정이 되는 건가 하면 그것도 아니다. 솔직히 수학은 빈말으로라도 잘한다고 말 못하는 과목이었으니까.


그럼 대체 왜 부른 거야?


하랑은 눈살을 찌푸렸다. 티엔은 하랑의 눈을 바로 보지 못하고 있었다. 하랑은 그가 어쩐지 제 눈을 피한다고 느꼈다. 드문 일이었다. 티엔은 언제나 부담스러울 정도로 올곧게 사람을 바라보고는 했는데.


"저 정도면 괜찮지 않아요? 핸드폰도 잘 안 하고."

"오늘 잠들었잖아."

"그거야, 뭐. 다른 애들도 다 그러잖아요."


하랑의 말에 티엔은 답이 없었다. 하랑은 손끝을 꼼지락거렸다.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까 좀이 다 쑤셨다. 하랑은 슬쩍 티엔의 책상 위를 바라보았다. 자로 잰 듯이 깔끔한 책상이었다. 대충 쑤셔 넣은 휴지 한 조각 없는 게 참 그다웠다. 파티션에 붙여둔 한자가 눈에 들어왔다. <雨垂穿石>. 하랑은 눈을 가늘게 뜨고 한자를 읽었다. 비 우, 그리고 모르겠고, 모르겠고, 돌 석. 하랑이 그걸 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티엔이 입을 뗐다.


"우수천석. 빗방울이 돌을 뚫는다는 뜻이다."

"아아."


둘 사이에 다시 묘한 침묵이 감돌았다. 하랑이 불쑥 물었다.


"저 이제 가봐도 돼요?"


티엔은 입술을 열어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이내 다물었다. 그는 다시 입을 열어 간신히 한 마디를 내뱉었다.


"아니."

"아, 왜요오."


하랑이 몸을 들썩였다. 배도 고프고 졸리고.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다. 그는 발가락을 까닥이며 티엔을 바라보았다. 티엔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눈가를 문지르는 모습이 퍽 피곤해보였다.


"내가."


티엔이 입을 열었다. 그는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하랑은 그를 바라보았다. 안경을 벗고 이렇게 둘이서만 보니까, 왠지 평소에 알던 그가 아닌 것 같았다. 차가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티엔은 목이 타는 듯 책상 위의 텀블러를 집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후우."

"쌤?"

"아니. 아니야. 가봐."


그는 이마를 짚은 채 손을 흔들었다. 하랑은 고개를 숙여 티엔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쌤? 어디 아프세요?"

"괜찮아. 가봐라."


자꾸 내쫓는 것만 같아서 더 오기가 생겼다. 하랑은 입술을 비죽이면서 자리에 주저앉았다. 흥. 결국 별 것도 아닌 거 가지고 부른 거였구만.


"뭐야. 왜 안 가."

"그-냥요!"


고개를 든 티엔이 물었다. 하랑이 킬킬대며 대꾸했다. 천진난만한 웃음이었다. 그 모습에 순간 티엔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니, 일그러진 게 아닌가? 하랑은 어쩐지 조금 긴장되어 등을 빳빳하게 굳혔다. 너. 티엔의 입술이 달싹였다. 분명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티엔의 손이 하랑의 팔목을 붙잡았다.


"가라고 했잖아."


그의 목소리는 낮게 잠겨 있었다. 티엔은 침을 삼켰다. 팔목을 붙잡은 손이 뜨겁다. 그가 다른 쪽 손으로 어깨를 붙잡았다. 순식간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맞닿는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이미 닿아 있었다. 입술이 부딪혔다. 굳게 다물린 입을 열고, 혀가 살짝 들어왔다. 낯선 감각이었다. 하랑은 차렷 자세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티엔은 하랑의 몸을 붙잡고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길고 도드라진 손가락이 손목에서 점점 더 위로 올라왔다. 교복 와이셔츠를 붙잡는 손길에서 조급함이 느껴졌다. 하랑은 제 단추를 끄르는 티엔을 붙잡았다.


"자, 잠깐-."


아. 티엔은 낮게 단말마를 내뱉고는 손을 거두었다. 하랑은 구겨진 셔츠를 손바닥으로 슥슥 문질렀다. 티엔은 난처한 표정이었다.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모습에서,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난패감이 묻어났다. 하랑은 티엔을 향해 입을 열었다.


"헐. 선생님 게이에요?"

"뭐? 아니. 아니, 아닌 게 아니라……."


하랑의 질문에 티엔이 당황한 얼굴로 말했다. 그는 횡설수설하다가 결국은 한 손으로 이마를 짚고는 말했다.


"하아. 게이 아니야."

"근데 왜 저한테 키스했어요? 설마 저 좋아해요?"


티엔은 한참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결국,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그런 것 같다."

"대박."


하랑이 입을 벌렸다. 그 모습에 티엔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뭔가 좀 더, 이렇게, 보편적인 반응이 나올 줄 알았는데."

"보편적인 반응이 뭔데요?"

"욕하고, 그런 거 있잖아."

"아아."


하랑은 멀뚱멀뚱 티엔을 바라보다가 무언가 생각이 난 듯 불쑥 말했다.


"근데 게이면 막 그, 뒤로 섹스하고 그러지 않아요? 쌤이랑 저랑 막 그렇게 해요?"

"하긴 뭘 해."


티엔이 딱 잘라 말했다. 하랑이 의자를 빙글빙글 돌렸다.


"왜 안 해요?"

"왜긴. 네가 아직 어리잖아."


열일곱이 어린가? 하랑은 입술을 비죽이며 생각했다. 대게 그 또래의 아이들이란 제가 다 큰 줄 아는 법이었다. 하랑은 어색한 분위기에 괜히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티엔이 짧은 침묵을 깨고 말했다.


"그래서, 대답은?"

"어, 잘 모르겠는데."


하랑이 대꾸했다. 얼떨결에 키스 당하기는 했는데, 사실 그런 것 가지고 그가 좋다느니 싫다느니 하는 생각은 없었다. 평소에도 그냥 무뚝뚝한 수학 선생 정도라고 생각했고. 자기를 좋아한다는 건 놀랍지만……. 너무 놀라서 오히려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 이거 첫 키스 아닌가?


"됐어. 가봐."


하랑이 고민에 빠지자, 티엔이 먼저 선을 그었다. 하랑은 발끝을 까닥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계속 남아있으면 아까 하던 거 또 할 거예요?"


그 말에 굳어있던 티엔의 표정이 순간 무너졌다. 그러나 그는 금세 다시 특유의 무심한 얼굴로 돌아와 말했다.


"어서 가. 자습 시작하겠다."

"헐."


티엔의 말에 하랑이 가방을 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습이 시작되면 학교를 빠져나가기 힘들었다. 감독 선생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오후 내내 자습을 해야 할 지도 몰랐다. 하랑은 교무실 문손잡이를 잡았다. 티엔은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바르게 앉아 컴퓨터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하랑은 문을 열고 나갔다가, 다시 고개만 빼꼼 안으로 들이밀었다.


"아, 쌤."


하랑의 목소리에 티엔이 고개를 돌렸다.


"저 방금 그거, 사실 첫 키스에요. 유치원 때 옆집 여자애랑 한 거 빼면……. 뭐, 그냥 그렇다구요!"


하랑은 그렇게 말하고는 교무실 문을 닫았다.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뛰어 계단을 내려갔다. 발걸음 소리가 복도를 경쾌하게 울렸다. 교무실에 홀로 남은 티엔은 그제야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뺨이 뜨끈하다.


"미치겠네."


티엔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름의 햇살이 작은 교무실 안에 넘치도록 찰랑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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