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데쿠캇] 외면하고 싶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봄의 입학식은 어딘가 들뜬 공기와 함께 찾아왔다. 곧게 뻗은 교정의 끝에는 커다란 벚나무가 우뚝했다. 만개한 벚꽃의 아래에서 어색한 얼굴로 서 있는 그 녀석을 보고 있자니 오랫동안 이어져 온 이유 없는 짜증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언제부터였는지 알 수 없는, 원인조차 바래진 짜증. 손끝을 우그러뜨리며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움찔, 몸을 떠는 것이 보였다. 짜증 나. 바쿠고는 먼저 고개를 돌렸다. 일일이 신경 쓰는 건 제 수준에 맞지 않았다. 곧 낙오할 녀석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거슬린 기분이 조금 풀어졌다. -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 오산이라는 걸 알리기라도 하듯, 녀석은 끈질기게 살아남았다. 멍청한 코스튬을 하고는 몸을 날리는 모습이 우..
[카게히나] 죽음과 맞닿은 엄마, 어디로 가는 거예요? 돌아선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 실밥이 조금 드러난, 낡은 붉은색 원피스가 기억에 남았다. 기분이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입던 옷이었다. 처녀 시절 충동적으로 샀다고 했던. 잘 있으렴, 아가. 그녀는 이마에 입을 맞추어주었다. 따뜻한 입술과 희미하게 풍기는 화장품의 냄새.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했던 나는 그저, 그녀를 물끄러미 바라볼 따름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사라졌다. *** 유쾌하지 못한 꿈을 꾸었다. 아주 오래전 일이었다. 이제는 희미하게 바랜 기억이 유난히 꿈속에서만 선명했다. 흐릿한 부분은 상상인지 무의식인지 모를 것들로 채워졌다. 히나타는 머리를 붙잡고 침대에서 일어났다. 서늘한 아침 공기가 닿았다. “일어났군.” 카게야마의 목소리였다...
[카게히나] 스물, 서른 대학생 AU. 이곳이 어디지. 히나타는 생각했다. 이곳이 어디지, 라고. 번잡한 거리의 가운데에서 그는 가지를 절단당한 가로수처럼 멀뚱히 서 있었다. 날은 거짓말처럼 맑았다. 오랫동안 이어진 장마의 흐릿하고 눅눅한 공기는 온데간데 없었다. 청명한 하늘에는 하얀 뭉게구름이 그림처럼 흩뿌려져 있었다. 모든 건물들의 경계가 햇빛을 받아 명백한 아웃라인을 그리는, 꿈처럼 선명한 세계였다. 히나타는 분주한 거리의 분위기에 섞이지 못한 채 부유했다. 파란 표지판에는 낯선 언어가 쓰여 있었다. 거리의 행인들은 그를 스쳐 지나갔다. 히나타는 갈 곳을 알지 못했다. “쇼요.” 누군가의 부름에 그는 몸을 돌렸다. 익숙한 듯 하면서도 이름이 단번에 떠오르지 않는 목소리였다. 일순, 눈부신 햇살 탓에..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보호되어 있는 글입니다.
[리에야쿠] 언젠가 찾아올 미래 판타지 AU.공녀 야쿠, 기사 리에프. 정교하게 꾸며진 풍경 정원에는 노란 프리지아가 흐드러졌다. 바람을 타고 높은 창까지 그 향이 전해져오는 것만 같았다. 청년과 소년의 중간에 선 어린 남자는 긴 남색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보석이 박힌 까만 초커로 목을 옥죄고 옅은 갈색 머리카락을 얌전히 늘어뜨렸다. 그는 창가에 서서 가만히 정원을 바라보았다. 푸른 잔디와 싱그러운 나무와 꽃들, 그 사이로 훤칠한 키의 남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길게 뻗은 팔과 다리,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은색 머리카락. 그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가를 올려다보더니 손을 흔들었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야쿠 씨!” 소년, 야쿠는 손을 마주 흔들었다. 그는 옅게 웃었다. 남자가 성 안 쪽으로 들어가는..
[쿠로츠키] 이른 가을 또 다른 세계.피아니스트 츠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는 쿠로오.어쩌다 사귀게 된 두 사람의 이야기. 그가 또 찾아왔다. 열어둔 창문 틈으로 부는 바람에 푸른 커튼이 흔들렸다. 밝은 오후의 햇살이 마른 나무 바닥을 적셨다. 희미하게 흩어지는 시야. 츠키시마는 귀에 익은 곡을 손가락 끝으로 더듬었다. 가을 연주회가 몇 주 남지 않았다. 또다시 찾아온 그는 가만히 의자를 가져다 앉았다. 맑은 음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그는 조용히 기다릴 줄 알았다. 츠키시마는 연주를 멈추었다. “쿠로오 씨.” 도대체 언제부터 이 남자와 이렇게나 친근하게 이름을 부르는 사이가 된 걸까. 쿠로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왔다. 나무 바닥의 먼지가 느릿하게 부유했다. “보고 싶어서 찾아 왔어.”“제가 어디 있는..
[해리포터AU] 선발시험 래번클로, 네코마의 이야기 “1학년들이 온다!” 누군가가 외쳤다. 다들 창문을 열고 성 밖을 내다보았다. 신학기의 시작. 짐을 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낯설고 어린 꼬마들이 저 멀리서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사냥터지기 해그리드는 커다란 손을 뻗어 1학년들에게 방향을 알려주고 있었다. 이른 가을의 선선한 바람이 불었다. 집합을 알리는 소리에 래번클로의 재학생들은 망토를 걸치고 잰걸음으로 탑을 내려왔다. 신학기를, 그리고 신입생을 맞기 위해 연회장으로 갈 시간이었다.커다란 연회장의 하늘은 어둑했다. 짙푸른 밤하늘 위로 별 무리가 흩뿌려져 있었다. 밝은 빛으로 타오르는 수백 개의 촛불을 앞에 두고, 학생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연회장의 끝에는 교수들이 앉은 긴 테이블이 놓였다. 고..
[오이스가] 슬픔에서 깨어난 어느 날부터 세상이 점점 잿빛으로 물들어갔다. 선명했던 사진이 세월이 지나 서서히 바래가듯, 나의 시계(視界)도 점차 바래갔다. 싱그러운 풀밭, 이른 봄의 벚꽃, 푸른 하늘과 학교의 담쟁이 넝쿨. 문득 선 건널목 앞의 신호등까지 색을 잃었다. 차츰 세상은 흑백사진처럼 변했다. 일상에 사소한 불편함이 생겼다. 크지는 않았지만, 이따금 손끝에 걸리는 것 같은 사소함. 엄마와 찾아간 시내의 병원에서는 큰 문제가 없다는 말뿐이었다. 시신경에 교란이 생긴 것 같다며 의사가 늘어놓는 장황한 의료용어들을, 나는 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리하며 잿빛이 되어버린 세계. 마치 어느 오래된 무성영화를 보듯 했다. 아주 늦은 밤, TV에서 흘러나오던 찰리 채플린의 우스꽝스러운 연기처럼. 제목을 잊..